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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가수 이름 크게 알린 정식데뷔곡 ‘창밖의 여자’

1979년 동아방송 연속극주제가로 태어나 빅히트…같은 제목의 영화도

  • 입력 2019.04.29 12:20
  • 기자명 왕성상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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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배명숙 작사, 조용필 작곡, 조용필 노래의 ‘창밖의 여자’는 ‘가왕(歌王)’ 조용필의 간판곡이자 그의 이름을 크게 알린 정식데뷔곡이다. 일본에까지 알려지는 등 여전히 인기다. 4분의 4박자, 슬로우고고 리듬으로 멜로디와 노랫말이 팬들을 잡아끈다.

조용필을 ‘국민가수’로 만든 ‘창밖의 여자’는 40년 전 라디오방송드라마 ‘인생극장’ 주제가로 태어났다. 1979년 동아방송(DBS) 연속극 모집에 배명숙 씨의 ‘창밖의 여자’가 당선작으로 뽑히고 주제가 가사도 냈다. 노랫말은 한편의 시였다. 방송사는 주제가 노랫말에 멜로디를 붙일 작곡가와 취입할 가수를 찾고 있었다. 그 무렵 “조용필이 방송활동 금지에서 풀렸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1979년 10·26사건 후 마침내 대마초 파동에서 벗어난 것이다. 동아방송 담당PD(안평선 한국방송인회장)는 조용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PD가 “작곡을 누구에게 맡기며 좋겠느냐”고 묻자 조용필은 “본인이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안 PD는 조용필이 작곡한 노래를 들어본 적 없었지만 그를 믿고 “그렇게 하자”고 한 뒤 전화로 가사를 불러줬다.

연속극보다 주제가 먼저 인기…노래신청 줄이어

1979년 12월 경기도 벽제(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있는 지구레코드 스튜디오에서 노래녹음이 시작됐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조용필이 목을 풀고 연습으로 1절 녹음 후 본 녹음에 들어가려할 때 기계가 고장 났다. 어쩔 수 없이 조용필은 다른 일을 하러 가버렸다. 방송드라마가 1980년 1월 2일부터 30회 방송되는데 주제가는 연습용녹음이 나갔다.

첫 전파를 탄 ‘창밖의 여자’ 노래반응은 대단했다. 첫 회 방송이 나가고 다음 날부터 방송사에 신청곡 전화가 잇따랐다. 조용필은 미국공연을 떠나 다시 녹음할 수도 없었다. 방송사는 1절을 되풀이해서 내보냈다. 연속극은 매일 1회분씩 방송됐지만 주제가는 하루에도 여러 번 나가 드라마보다 노래가 먼저 떠버렸다.

그렇게 해서 1980년 3월 ‘창밖의 여자’ 음반이 나왔다. 조용필은 1998년 11월 16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끼니까지 걸러 가며 오선지와 씨름한 지 닷새, 밤을 꼬박 새우고 깜빡 잠이 들었다. 꿈결에서 그렇게 이어지지 않던 멜로디가 귀에 들려와 미친 듯이 악상을 옮겨 적었다”고 말했다. 선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머릿속에 맴돌던 악상들이 술술 풀려나왔다고 회고했다. 그는 악보를 들고 동아방송 녹음실로 뛰어갔다. 조용필이 오래 갈고 닦은 감성 창법이 절절히 배어있었다. 녹음실 밖에 있던 안 PD와 배 작가가 노래를 듣다가 눈물을 글썽였다. 피를 토하듯 이어지는 한 섞인 노래는 듣는 이를 감동케 했다. 절규하듯 부른 노래는 그해 5월 광주의 아픔과 혼돈스런 시대를 살아야했던 민초들 가슴을 달래줬다.

‘창밖의 여자’는 1980년 각 방송의 가요상들을 휩쓸었다. 그해 9월 동양방송(TBC/언론 통·폐합으로 KBS-2TV가 됨) ‘제16회 방송가요대상’의 최우수 남자가수상을 받았다.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왕이 됐고, 국내 가수 중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홀 초청공연도 했다. 서울국제가요제 금상도 안았다. 이 노래는 ‘대마초 사건’으로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던 조용필의 새 출발에 결정적 역할을 해 ‘조용필 시대’ 막이 열렸다. ‘창밖의 여자’는 조용필을 가요계 대스타로 만든 ‘1등 공신’이기도 하다.

지금의 음악그룹 ‘위대한 탄생’이 결성돼 1집 음반 ‘창밖의 여자’를 내자 100만장 넘게 팔렸다. 빅히트한 건 조용필의 뛰어난 가창력, 시적(詩的) 내용의 가사, 시대흐름에 맞는 수준 높은 작곡에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작사가가 라디오방송에서 들려준 설명에 따르면 노랫말 내용 중 ‘그대의 흰 손’은 순수한 사랑을 뜻한다. 예전엔 여성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가 하얀 손이기도 했다. 멜로디도 발라드풍이어서 국내 가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새 장르를 열었다.

‘첫 아내와 연애시절 사연 담은 곡’이란 설(說)도

일부에선 이 노래가 조용필과 그의 첫 아내 박지숙과의 연애시절 사연을 담은 곡이란 설도 있어 흥미롭다. 조용필은 1984년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봉선사에서 007비밀작전에 못잖은 결혼식을 올려 화제였다. 박지숙은 국회의원이자 공주 신풍중·고 이사장인 박찬 씨 딸로 조용필과 사귀었다. 그녀는 동덕여고, 한양대 무용과를 졸업하고 아버지 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있었다. 둘은 서울과 공주를 오가며 연애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필은 박지숙 집에 찾아가 예비장인에게 혼이 났다. 쫓겨나오다시피 한 그가 달려간 곳은 공주시내 한 여관방.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4홉들이 소주 2병을 마시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됐다. 그는 속이 좋지 않아 여관방 창문을 열고 토했다. 바로 그때 비 내리는 가로등 아래 서있는 한 여인을 봤다. 며칠 후 조용필은 그 모습에 악상이 떠올라 ‘창밖의 여자’를 만들었다는 설이다. 노래가 크게 히트하자 같은 제목의 영화도 나왔다. 1980년 제작된 김문옥 감독의 멜로물(상영시간 96분)로 윤삼육 씨가 각본을 쓰고 진수경, 한진희, 유장현, 김정철 등이 출연했다.

배우 안성기와는 학창시절 ‘짝꿍’

노래주인공 조용필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상 최고 가수이자 ‘전설’로 통한다. 그는 지난해 데뷔 50주년 기념 전국음악투어를 마쳤다.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부잣집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조용필은 서울 경동중·고를 나왔다. 중학교 땐 대구서 올라온 안성기도 다니고 있어 짝꿍이 됐다. 둘은 지금도 친하다.

조용필은 학창시절 음악에 빠져 지냈다. 고교 3학년 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갈등을 겪으며 집을 나와 버렸다. 자신의 기타를 여러 대 부순 아버지와 대화가 안 된다고 보고 가출한 것이다. 이후 1969년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음악 삶을 시작했다. 미군 상대로 연주를 한 그는 컨트리웨스턴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 ‘화이브 핑거스’를 만들어 미8군 무대에 섰다. 1971년 5월엔 3인조 록그룹 ‘김트리오’를, 1972년엔 ‘그룹 25시’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73년 방위병(해안경비)으로 복무했다. 그는 퇴근하면 음악을 하면서 1974년 ‘조용필과 그림자’ 노래그룹을 만들었다. 1975년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 가수로 이름을 올렸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계열 동포들의 모국방문에 맞춰 발표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70년 김해일이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리메이크한 노래다.

조용필은 정규음반 20집(비정규앨범까지 합치면 50개)을 내기까지 가요계 대표가수로 39년을 뛰었다. 그에게 따라 붙는 기록이 많다.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 ▷장르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 및 인디음악개념이 생기기 전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지역을 바탕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가 그것이다. 2013년 10년 만에 내놓은 새 음반(‘헬로’)과 수록곡 ‘바운스’는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됐다.

‘대마초 사건’, 이혼과 재혼·사별

‘노래인생 50년’의 조용필에게도 어려운 때가 꽤 있었다. 1977년 ‘대마초 사건’으로 1979년까지 방송출연금지 등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다. 1960년대 말 미8군 음악시절 대기실에서 잠깐 피운 대마초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투서로 대마초 흡연시비에 휘말려 가요계를 떠나 축구선수 이회택과 낚시터 등지로 나돌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재기를 꿈꿨다. 전국 유명 절을 찾아다니며 판소리공부로 목소리를 다듬었다. 이혼(박지숙), 재혼(재미교포 안진현)·사별 등 힘든 개인사도 ‘자연인 조용필’ 삶을 괴롭혔다. 노래저작권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음반사가 갖고 있던 자신의 히트곡 31곡 권리를 27년 만에 되찾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관계자는 “2013년 10월 지구레코드 임재우 사장이 원저작자 조용필 씨에게 ‘창밖의 여자’ 등 31곡의 배포권과 복제권을 넘겨준다’는 내용의 공증서류가 접수됐다”고 밝혔다. 이 31곡은 ‘창밖의 여자’ 외에 ‘단발머리’, ‘촛불’, ‘고추잠자리’, ‘여행을 떠나요’ 등 인기곡들이다. 조 씨는 1986년 12월 지구레코드 고 임정수 회장과 음반프로덕션 계약 때 ‘지적재산권 일부양도’ 계약을 함께 맺었다. 조 씨가 작곡한 31곡에 대한 복제권, 배포권을 임 회장이 갖는 내용이었다. 조 씨는 그때만 해도 저작권 개념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터라 문제의식 없이 서명했다. 조 씨는 이들 노래가 방송, 공연에서 연주되거나 불릴 때의 저작권료는 받았으나 자신의 곡을 재녹음해 음반, DVD 등으로 팔 땐 임 회장에게 저작권료를 내왔다. 조 씨는 소송까지 벌였으나 2004년 대법원에서 “정당한 계약이었다”며 패소했다. 임 회장 별세 후 배포권, 복제권은 고인의 아들에게 넘어갔다. 이런 사실은 2013년 4월 조 씨의 19집 음반 ‘헬로’가 높은 인기를 끌자 시나위의 신대철 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용필 선배님은 계약을 잘못하면서 저작권이 지구레코드로 넘어갔다”고 밝혀 알려졌다. 팬들은 ‘조용필의 31곡 저작권 반환을 요구합니다’는 청원을 벌였다. 조 씨와 임 사장은 저작권 인도계약에 대한 구체적 합의내용에 대해선 5년간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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