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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의 도전은 끝이 없다! 소화기계의 명의 심찬섭 교수의 ‘나의 삶, 나의 도전’

  • 입력 2019.05.10 15:51
  • 기자명 강지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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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소화기계의 명의 심찬섭 교수가 그동안 몸담았던 건국대학교 병원을 떠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심 교수는 한국 소화기 치료 내시경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소화기병 분야의 세계 최고의 권위자다. 내시경 분야에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무조건 죽는다는 소화기암을 극복 가능한 질환이라는 인식이 심어지기까지에는 심 교수의 뼈를 깎고 살을 에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40여 년 동안 몸담으면서 수많은 업적의 중심에 있었던 심 교수, 그런 그가 이제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있어 쉼표 없는 세 번째 무대의 막을 올렸다. 명의, 스타 닥터, 최초와 최고라는 수많은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식지 않는 열정으로 또 한 번의 도전을 시작한 심찬섭 교수를 MD 저널이 만났다.

양이 곧 질이다, 무대가 있으면 어디든 간다!

“학술대회가 있으면 국내든 국외든 무조건 찾아다녔어요. 교수가 해야 할 일은 일단 논문 쓰는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욕을 먹건 박수를 받건 그것은 일단 무대 위에 서고 난 뒤에 일이죠. 삼진이 무서워서 마운드에 서지 못한다면 평생 홈런을 칠 수 없어요.”

심찬섭 교수가 대학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82년, 그가 줄기찬 논문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심 교수가 수련을 받던 시절 순천향병원은 아직 대학병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수련 1년 차에 순천향대병원으로 승인을 받게 된 것, 당시에는 수련을 마치고 나면 개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심 교수는 개원보다는 학문에 더 관심이 많았고, 이를 잘 알고 있던 담당 과장이 전임강사를 제안하게 된다. 심 교수는 ‘이것은 나에게 기회다’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결코 마음에 부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연 교수의 길은 무엇일까’,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한동안 따라다녔고, 심 교수는 ‘후회 없는 선택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대학병원이라고 하더라도 신설이었던 탓에 여건은 생각보다 부실했다. 이 이름 없는 대학병원을,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햇병아리 교수를 알릴 방법은 논문이라고 생각했다.

“학술대회에서 발표해 본 경험도 없고, 논문도 많이 써보지 못했죠. 그래도 일단 해보자는 생각으로 학회 때만 되면 논문을 준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수준의 논문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게 너무 좋고 재미있었죠.”

말 그대로 이름 없는 대학에서 이름 없는 교수가 학회 때마다 나와서 발표를 하니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에서는 젊은 친구가 참 기특하다는 칭찬도 받았고, 유명 대학 사이에서 시기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심 교수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일단 ‘질보다 양’이라는 생각에 정말 타자기처럼 논문을 써 내려갔고, 또 그러다 보니 논문의 수준은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학술대회가 열리면 당연히 심 교수가 나오나보다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의 어쭙잖은 불평들은 새 논문에 대한 기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심 교수의 노력이 사람들 마음속에 있던 편견의 산을 옮긴 것이다.

학문의 바다는 넓다, 세계로 눈을 돌려라!

심찬섭 교수의 학술대회에 대한 열정은 국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심 교수는 서서히 눈을 해외로 돌리기 시작했다. 국내의 교육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심 교수는 일본 연수를 택하고, 교토 제2적십자병원에서 평생의 스승인 나까지마 마사쯔구 교수와 가와이 교수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심 교수는 스텐트 원리와 제작 기술을 익히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1986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담도 스텐트 삽입술’을 시행하게 된다.

당시 이러한 기술은 국제적으로도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후 심 교수는 ‘심하나로’ 담도 스텐트를 비롯해 일탈방지용, 경부식도용, 양성협착용 식도 스텐트, 대장 스텐트 등을 개발하며 국내 스텐트 기술을 세계 무대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심 교수의 관심은 외국 학회였다. 국내학회의 한계를 느낀 심 교수는 외국 학회에 참석하면서 우리도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 교수는 먼저 학회 차원이 아니라 대학이 주관이 되어 워크숍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많은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시도였다.

순천향대병원의 승인을 얻은 심 교수는 외국의 연자를 초청해 워크숍을 개최했고, 그 수가 쌓일 무렵 이번에는 외국에서 심 교수를 초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심 교수는 외국에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들어가면서 이제는 내로라하는 세계의 저명한 권위자들도 심 교수를 보면 ‘Hey, Dr. Sim’이라고 먼저 인사를 나누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심 교수가 주최하는 학술대회나 워크숍에는 일반 학회에서 초대하기 힘든 외국 연자들이 보통 10명에서 많게는 16명까지 참석을 하니 말 그대로 ‘별들의 축제’가 아닐 수 없었다.

심 교수는 2년마다 워크숍을 열었고, 매회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그렇게 5번의 워크숍을 개최했다.

하지만 여섯 번째 워크숍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예상하며 10여 명의 해외 연자를 초대하고, 혹시라도 모르는 자리 부족을 대비해 접이식 의자까지 미리 준비했다. 하지만 심 교수는 몰랐다. 무시는 사람에게 오기를 주지만 질투는 사람을 주저앉히고,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간사한 마음이라는 것을…

자기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내는 심 교수가 아마도 그들 눈에는 탐탁지 않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6회 국제 워크숍에는 참석자가 강사보다 적을 정도의 참패를 맛봐야 했다. 결국, 그 일을 계기로 국제 워크숍은 6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심 교수의 도전이 막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2009년, 심 교수는 건국대학교병원에서 그의 세 번째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세계 최고의 소화기병센터, 꿈이 아닌 현실로

2009년, 심찬섭 교수는 그동안 정들었던 순천향대병원을 떠나 당시 신설 대학이나 다름없었던 건국대학교병원행을 택한다.

“건국대학교병원 의과대학이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환경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곳이다 보니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또 다른 일들을 해나갈 수 있지 않을 것이라는 욕심이 생겼죠.”

그때는 일반적인 진단 내시경에서 치료 내시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 사실 심 교수는 치료 내시경을 배우기 위해 이미 1985년도에 독일 연수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다시 말해 그 시기는 심 교수가 연구해온 치료 내시경의 드디어 열매를 맺을 때라는 뜻이기도 했다.

심 교수는 이듬해인 2010년에 국내 유일의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소화기병센터를 출범시키게 된다.

건국대병원에서 심 교수는 이전에 못지않은 활약을 벌인다. 먼저 세계가 인정하는 전문 소화기병센터를 시작으로 기존의 상식을 탈피한 새로운 개념의 ‘국제 워크숍’을 개최하게 된다. 특히 제1회 국제 워크숍에서는 일본, 싱가포르, 중국, 타이완, 인도, 영국, 미국까지 7개 국가에서 무려 600여 명의 전문가가 참석하는 등 개최 측에서도 놀랄 정도의 성과를 거둔다. 또한, 국내 최초로 국제화상회의 시스템을 도입해 외국 유수 병원의 시연 장면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등 독보적인 센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심 교수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의료의 독점적 소유’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심 교수, 그는 시간이 날 때면 지금까지의 논문과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저서로 엮는 작업에 몰두한다.

심 교수는 ‘캡술내시경 진단 가이드’를 시작해 ‘대장내시경의 진단과 치료’, ‘복부초음파 진단 에센스’ 등 다수의 책을 번역 또는 직접 집필하고, 최근에는 소화기내과 의사들을 위해 다양한 임상증례를 담은 ‘흥미로운 소화기 임상증례의 내시경치료’를 출간해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심 교수는 건국대학교병원에 재직하면서 말 그대로 ‘명의의 교과서’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 그가 2019년 4월 다시 한번 도전을 시작했다.

연구를 위해 태어난 의사, 심찬섭 교수

지난 3월 심찬섭 교수는 갑자기 건국대학교병원을 정리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적잖이 놀랐고, 또 일부에서는 워낙 워커홀릭으로 소문난 그였기에 또 무슨 일을 벌일까 하는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2009년 건국대학교병원을 오고 나서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소화기병센터를 맡을 새로운 인물이 필요할 때입니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선배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죠.”

갑작스러운 심 교수의 선언, 하지만 그동안 그는 소화기병센터를 맡을 인물을 꾸준히 트레이닝 시켜왔다. 그래도 ‘심찬섭’이라는 스타 닥터의 이름을 대신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지 않을까.

“스타 닥터니 명의니 하는 말은 그냥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일 뿐, 결국 의사는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인정받는 법입니다. 저는 현재 소화기병센터 의사들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자부심이야말로 심 교수의 결정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준 요인이었다. 그리고 그가 실질적으로 건국대학교병원을 나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정체되지 않기 위해서다.

“스텐트를 개발할 때 우리나라의 의료 기술은 그리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온종일 머릿속에는 스텐트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의료기 자체가 많이 업그레이드되고, 워낙 많은 분야에서 개발이 되어서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느껴지니, 솔직히 말해 재미가 없더군요.”

말이 달리기 위해 태어난 동물이라면 심 교수는 연구를 위해 태어난 의사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예전 그의 목표가 기존의 것을 보완하고 더 나은 것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얘기가 다르다. 지금의 목표는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만드는 것,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도전이다.

물론 그때의 노력보다 더 많은 열정과 에너지가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그의 발목을 잡거나 포기를 위한 어떤 변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네 번째 도전이 다시 한번 성공한다면, 분명 소화기병의 역사는 새롭게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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