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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씬하고 아름다운 거식증 환자
  •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 승인 2019.07.1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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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마흔 세 살의 나이에 맞지 않게 응급실에서 저를 기다리는 백인여성은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이십여 년 간 거식증을 앓은 그녀는 대부분 거식증 환자의 경우처럼 상류가정에서 태어났고 지식이 뛰어나며 부모님의 말에 잘 따르는 모범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상급반, ‘아름다운 몸매’가 나타날 때쯤부터 그녀는 ‘살찌는 데 대한 심한 공포’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식구들의 눈을 피해 극도로 심한 운동을 시작했고 헐렁한 옷을 걸치고 다녔기 때문에 처음에는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월경이 몇 달간이나 끊어졌었지만 자신만 알고 숨겼답니다. 달리기를 하다 쓰러져 응급실에 갔을 때, 그녀의 체내 전해질 대사는 염분이나 칼리(K, 미국의사들은 Potassium이라 부름) 농도가 떨어져 있어 심장이 멎기 직전 단계였답니다. 거식증 환자 5%에 해당하는 사망자의 통계숫자에 포함될 뻔한 것입니다. 정상 몸무게(자신의 키와 나이에 맞는)의 15%이상 체중이 감소된 상태였지만 그녀는 정도 이상으로 운동을 많이 했으며, 자신이 남보다도 뚱뚱하다는 왜곡된 Body Image를 소유했었답니다. 4주간 입원해 있으면서 간혹 침대에 묶여 누워있었다니 얼마나 심한 과잉운동으로 몸무게를 떨어버리려고 했는지 짐작이 가는 전형적인 케이스였답니다.

현재의 남편을 만났을 때, 그녀는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답니다. 그녀의 가녀린 소녀 같은 몸매, 항상 자신감을 잃고 열등감에 시달리는 우수에 찬 모습 등이 오히려 ‘여성다운 매력’으로 다가왔고, 자신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듯했답니다.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고집으로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운동을 하는지는 나중에야 알았지요. 남편이 갈망하는 접촉을 그녀는 한사코 거부했답니다. ‘성은 더러운 것’이라는 소녀 같은 엉뚱한 망상에 젖어 있는데다가, 거의 월경이 없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임신이 되었는지 자신들도 놀랐답니다. 임신 중에도 그녀는 태아보다는 본인의 몸매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답니다. 만일 남편이 서둘러서 입원치료로 음식물을 튜브 섭생(Tube-Feeding)시키지 않았더라면 건강한 아기가 탄생하지 못했을 거라는 게 의사의 의견이었답니다.

어쨌든 아기는 엄마를 닮은 예쁜 여아였습니다. 엄마도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젖을 먹이지 않겠다고 했고, 의사들의 권고도 있어서, 아기는 우유를 먹으면서 아빠의 사랑안에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남편은 그간 부인의 정신과 치료를 위해서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합니다. 우선 걸핏하면 자살미수 소동을 부리는 그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지만 한사코 항우울제나 다른 약물치료는 거부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상담 받는 것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몇 년간을 계속해왔다고 합니다. 게다가 10살이 넘으면서부터는 딸아이도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고, 그때마다 모녀의 언쟁은 엄마의 자살소동으로 연결되었답니다. 부부가 다른 집을 쓰면서 산지가 벌써 수년이 된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였지요.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딸은 아버지의 집에서 기거를 했습니다. 환자는 그간 몇 차례의 새로운 관계를 시도해보았지만 종래에는 모두 실패하고 결국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설 때마다 남편에게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번에 다시 응급실로 불려오게 된 이유는, 17세 딸과의 언쟁 후에 시도한 자살미수 때문이었습니다. 17세의 딸이 ‘거식증 증세’를 엄마와 같이 지낸 주말 동안에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엄마는 자신의 만성적 정신질환이 딸에게 미치는 영향을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본인의 정신과 의사를 정해 달라고 제게 청했습니다. 비록 약간의 부작용이나 불편이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우울증이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을 일삼으며 가족을 괴롭히던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에 일관된 정신질환으로부터 치유되고 싶다면서…

결국은 이십여 년 간이나 기다렸던 남편의 인내와 딸을 거식증에서부터 보호해야겠다는 엄마의 사랑이, 이 중년여성에게 참된 치유의 의지를 준 셈입니다. 딸의 거식증 증세가 유전적인 원인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환경적 요인에서 나온 것인지 연구가 진행 중인 현 상태에서, 우선 엄마의 강한 결심이 이 가족에게 가져온 치료효과는 막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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