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OPINION 전문가 칼럼 정정만
<들무새의 초상> 종자돈Seed Money
  • 정정만(성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08 10:59
  • 댓글 0

[엠디저널]말은 질주 본능이 있다. 말 ‘馬’자는 질주하는 말갈기를 상형화한 상형문자다. 경주마(競走馬) 나이가 7~8세가 되어 경주능력이 떨어지면 현역에서 은퇴한 후 거처를 민간 목장으로 옮겨 승마용이나 관상용으로 여생을 보낸다. 하지만 현역 시절 경주 성적이 탁월한 경마는 은퇴한 후에도 종마(種馬)로 발탁돼 집안 좋은 암말에게 수도 없이 씨앗을 뿌려대며 온 갖가지 호사를 누린다.

경주마로써의 화려한 삶은 길어야 5~6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종마로 선택받은 놈은 정말 행운의 마생(馬生)을 사는 것이다. 명문의 혈통과 가문 출신에다 경주마 시절 뛰어난 성적을 올린 미국 종마(種馬) 스톰캣(Storm Cat)은 채종(採種)을 원하는 암말에게 한 번씩 정액을 뿌려줄 때마다 50만 달러의 종자돈을 벌어 들였다.

소문난 명마는 세계를 누비며, “씨앗 뿌리기” 정기(定期) 투어를 반복하는 셔틀 스탤리온(Shuttle Stallion)이 된다. 떼돈도 떼돈이지만 이놈들이 누리는 사치 호강은 실로 제왕의 팔자를 초월하는 엄청난 것. 원로(遠路)를 마다하고 세계 도처에서 씨받이 여행을 감행한 암말도 부지기수다. 직접 수컷 말을 찾아가 ‘씨 내림’의 은총을 기다린다. 하지만 씨 내리 놈들은 씨받이라고 아무나 상대하지 않는다. 머리에 든 것 없고, 돈만 많은 씨받이는 극구 사양한다. 처가의 가문과 현역 시절의 학교 성적을 철저히 따져 정액 시혜를 결정한다. 좋은 토양에 좋은 씨를 뿌려야 더 좋은 싹이 돋아나기 때문이다. 유명 종마의 씨아은 바로 엄청난 거금이다.

인간의 씨앗 값은 어떠한가? 미국정자은행에서 거래되는 사람의 종자 값은 기껏해야 200~600달러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번 인공 수정할 때 들어가는 정자의 원가는 유명 종마의 종자 값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에 피다. 물론 제공자의 지적 수준, 사회적 지위나 정자의 가공처리 방식, 냉동 방법, 선적료 유무에 따라 최고 250~350달러 정도 추가된다. 정자 제공자의 신장, 체중, 종족, 교육 정도는 통상 공개되지만 그 외의 상세한 정보를 알고 싶으면 수천 달러를 더 내야 하는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정자은행에서 정자 제공자의 정보를 상품화한 것이지 정자 자체의 가치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다 해도 수컷 인간 종자 값이 수컷 말보다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남자의 1회 사정 액 중에 존재하는 2~3억 마리의 정자를 한 마리 당 1원만 쳐도 2~3억 원이 아닌가. 아니 10전씩만 환산해도 2~3천만 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내의 씨앗을 헐값으로 사고파는 인간사회의 씨앗 정산 방법은 아무래도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사내의 씨앗은 돈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사람들은 씨앗의 소중함을 외면한 채 돈을 주고 버리는 쓰레기로 취급한다. 사춘기라는 격동의 시절, 통정(通精)이라는 생리현상을 겪은 다음부터 무차별 유기되는 정자의 운명도 따지고 보면 씨앗이 결코 돈일 수 없기 때문이다. 씨앗이 씨받이 함(函)에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정액 씀씀이가 너무 헤픈 인간 탓이다. 오남용에 의한 정자의 비애는 도처에 즐비한 정자의 변사체로 증명된다. 화장지 위에서 고사(枯死)한 놈, 세면기 바닥에서 아사(餓死)한 놈, 콘돔에 처박혀 쓰레기 통해서 질식사 한 놈, 비눗물이나 변기통에서 익사(溺死)한 놈, 타액의 소화 효소나 살정제(殺精製) 같은 화학 무기에 화학사한 놈, 동굴 밖에서 변사(變死)한 놈이 어디 하나 둘인가? 뿐만 아니라 씨 내리받기 굿판 전후에 알과 해후를 차단시키는 피임약 등 모두가 일상으로 자행되는 인간의 집단 살정(殺精)방식이다. 그러다가 천신만고 끝에 어찌하다 생명을 이루기라도 하면 칼끝으로 끄집어내는 무지막지한 살인 행각까지…

그래서 인간사회는 비명횡사하는 정자들의 원혼이 지천에 떠돈다. 이렇듯 생명의 씨앗을 천대하는 몹쓸 짓을 예사롭게 반복하는 인간. 사악한 인간들이 범하는 씨앗의 남오용은 평범한 경제원리에서 비롯된 셈이다. 염색체 23개를 지닌 예비생명이요, 절반의 생명체, 정자! 어쩌다 이처럼 천덕꾸러기가 되었을까? 환경 호르몬에서 의한 남성 씨앗의 감소, 그래서 씨앗 결함에 의한 불임부부가 갈수록 늘어나도 여전히 남자의 씨앗 값은 오를 기미마저 없다.

남자는 누구나 경주마의 운명을 받고 세상에 태어난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한 발짝이라도 앞서가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한다. 성취도 하고 실패도 있다. 설사 성공한 남자라도 나이가 들어 은퇴하면 경주마로써의 명성을 뒤로한 채 주축 인간들의 관심 밖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다 여명을 마친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허세형, 생계형 씨받이들은 지체 높고 돈 많은 재벌들의 씨 내림을 꿈꾼다. 하지만 씨 자체가 아니라 씨받이함(函) 임대 대가를 노리는 쓰레받기가 허다하다. 돈을 주는 씨내리, 돈을 받는 씨받이다. 동물 세계와 정면으로 상치되는 인간 사회의 현행 정자가격(精子價格) 시스템은 실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평범한 남자는 상품가치가 뛰어난 경마로써의 수명이 다해도 종마로써의 삶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의 모든 수컷들이 종마처럼 대우 받는 사회를 그려본다.

정정만(성칼럼니스트)  emd@mdjournal.net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정만(성칼럼니스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