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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제 뇌전증 치료 후진국에서 벗어날 때

[엠디저널]“치매 지원의 100분의 1이라도 뇌전증 환자를 위해 지원해 주십시오!”

이 간절한 외침은 뇌전증 환자나 그 가족이 아닌 뇌전증 치료에 지원을 바라는 의사들의 목소리다. 뇌전증은 ‘반복적인 발작’을 주 증상으로 하는 치매, 뇌졸중 다음으로 흔한 3대 신경계 질환이다. 뇌전증 환자의 약 70%는 약물치료로 발작 없이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이 말은 반대로 나머지 30%는 반드시 수술이 필요한 환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 4,000명 이상이 매년 수술 전 검사를 받지만 실제로 뇌전증 수술을 받는 경우는 300건에 미치지 못한다. 또한, 뇌자도나 삼차원뇌파수술 로봇시스템, 그리고 레이저 열 치료 수술 장비같이 뇌전증 수술에 필요한 장비는 국내에 단 한 대도 없어, 뇌전증 환자들이 일본이나 미국에 가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현실이다.

뇌전증 환자의 수는 치매 환자의 약 50%에 달하고 있지만, 정부는 치매에만 수조 원을 지원하면서도 뇌전증 환자에게는 전혀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이 ‘뇌전증 치료의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한뇌전증학회 홍승봉 편견대책위원장(삼성서울병원 신경외과 교수)은 “수술로 치료될 수 있는 환자들이 수술을 받지 못해 쓰러져 얼굴, 팔, 다리가 찢어지고, 골절, 화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다”며, “뇌전증 환자의 가족들은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으며, 의사들도 정부 지원이 없어 절망감에 빠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특히 홍 교수는 “단 50억 원의 정부 지원만 있어도 중증 뇌전증 환자들이 일본, 미국에 가지 않아도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한편, 대한뇌전증학회는 뇌전증 환자에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해소하고, 정부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연구 중간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엠디 저널은 Hot Issue 코너를 통해 중간 보고서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신경계 질환 중 사망 원인 2위, 뇌전증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치료 자료를 근거로 조사한 결과 뇌전증 환자의 수는 약 36만 명, 그중 약 10만 명이 약물로 완전히 증상이 조절되지 않는 약물난치성 뇌전증으로 나타났다.

항경련제로 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은 모두 수술을 고려해야 하며, 이들 중 경련 증상이 자주 발생해 일상생활이 매우 어려운 경우인 중증 약물난치성 뇌전증으로 당장 수술이 시급한 환자는 약 37,225명이었다. 또 이들 중 여러 가지 검사 후 수술 대상이 되는 뇌전증 수술 대기 환자는 22,335명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뇌전증 수술을 1년에 300건도 하지 못하는 참담한 실정이며, 더욱이 매년 약 2만 명의 뇌전증 환자가 새로 발생해 수술이 필요한 뇌전증 환자는 매년 1,000명씩 증가하고 있다.

한국에서 뇌전증 환자가 줄어들기 위해서는 1년에 1,500~2,000건 이상의 수술이 시행돼야 환자가 줄어드는데, 실질적으로 매년 1,000건의 수술을 한다고 해도 현재 뇌전증 수술 대기 환자들이 모두 수술을 받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린다.

선진국형 의료를 지향하고 있는 한국에서 이처럼 수술 건수가 적은 이유는 인력의 부족이 아니라 ‘뇌전증 수술에 꼭 필요한 장비’들이 없고, 치매나 뇌졸중과 같은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국내 뇌전증 수술의 완치율은 평균 71.6%로 나타나고 있다.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의 사망률은 일반 환자보다 10배가 높고, 급사(急死)율은 무려 27배에 달한다. 약물난치성 뇌전증의 유일한 치료법은 뇌전증 수술이다. 따라서 정부는 ‘뇌전증 수술은 곧 생명을 구하는 치료’라는 것을 반드시 인지해야 하며, 뇌전증 수술의 지원과 활성화가 시급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치매, 뇌졸중, 뇌전증은 3대 신경계 질환인데, 이중 뇌전증은 신경계 질환 중 뇌졸중 다음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사망 원인 2위,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서는 1위로 나타났다.

국내에 단 한 대도 없는 뇌전증 수술의 3대 필수 수술 장비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에게 뇌전증 수술은 최선이자 유일한 치료법이다. 뇌전증 수술에 필요한 진단 및 수술 장비는 뇌자도(MEG, magnetoencephalography)와 삼차원 뇌파수술 로봇 시스템(StereoEEG), 그리고 레이저 열 치료 수술 장비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수술 장비는 국내에 단 한 대도 없으며, 정부에서도 지원 요청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떠한 답변도 없다. 그렇다면 이 수술 장비들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 뇌자도(MEG, magnetoencephalography)

▲ 사진 1. 뇌자도

뇌자도는 신경세포에서 발생하는 자기(磁氣, magnetism)를 측정하는 최첨단 진단 장비다. 뇌파 검사는 뇌표면의 굴곡과 두개골에 의해 크게 왜곡되지만 뇌자도는 왜곡이 전혀 없고, 공간 해상도가 뇌파 검사에 비해 10배 이상 높다. 뇌자도는 뇌전증이 발생하는 뇌 부위를 진단하는데 가장 중요한 검사 장비로 전 세계 179대가 설치 및 운영되고 있다. 일본과 미국에는 40대 이상 뇌자도가 뇌전증 수술에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단 한 대도 없어 중증 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이 일본 교토대학교병원에서 고가의 비용으로 뇌자도 검사를 받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뇌자도 검사가 필요한 환자 수는 1년에 약 2,500명으로 3~4대의 뇌자도가 필요하다. 뇌자도 장비의 가격은 약 30억 원이다.

◆ 삼차원 뇌파수술 로봇시스템(SEEG)

삼차원 뇌파수술 로봇시스템은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이어서 뇌전증 수술에 꼭 필요한 수술 장비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활성화돼 뇌전증 수술의 70% 이상이 삼차원 뇌파수술 로봇시스템으로 수술을 시행하고 있다. 이 수술 장비 역시 국내에는 단 한 대도 없다. 

현재 국내 뇌전증 수술은 의사의 술기로 진행되기 때문에 수술 시간이 2배 이상이 걸리고 정확도가 떨어진다. 또 수술 중 뇌출혈이 발생하고, 전극이 다른 곳으로 들어가거나 수술 후 감염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146대(2019년 4월 기준)의 삼차원 뇌파수술 로봇시스템이 뇌전증 수술에 활용되고 있다. 삼차원 뇌파수술 로봇시스템 한 대의 가격은 약 10억 원이다.

◆ 레이저 열 치료 수술 장비

▲ 레이저 열 치료 수술 장비 전 세계 분포 현황

뇌전증 수술에 필요한 세 번째 장비는 레이저 열 치료 수술 장비로 두개골을 열지 않고 조그만 구멍을 뚫고 내시경으로 뇌전증 병소를 제거할 수 있다. 뇌의 깊은 곳에도 접근이 가능하며 병변이 여러 개 있을 때도 쉽게 제거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에서 레이저 열 치료 수술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뇌전증 수술의 약 20~30%가 레이저 열 치료 수술로 이뤄진다. 전 세계적으로 215대의 레이저 열 치료 수술 장비가 뇌전증 수술에 활용되고 있다. 레이저 열 치료 수술 장비 역시 국내에는 단 한 대도 없다. 레이저 열 치료 수술 장비의 값은 약 5억 원이다.

뇌전증 환자의 안전과 생명,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가장 중요해

국내 뇌전증 환자들은 병도 병이지만 먼저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특히 질병을 숨기고 생활하는 것은 물론 학교생활, 취직, 결혼, 기타 사회생활에서 수많은 불이익을 겪고 있다. 또한, 뇌전증 치료에 대한 정보의 부족으로 체계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약물난치성 뇌전증 환자의 신체·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울러 뇌전증은 유병기간이 길어 돌봄이 있어야 하는 치매, 희귀난치성질환, 중증 만성질환 등 유사질환과 비교해도 의료적,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은 더욱 심각하다. 하지만 뇌전증 환자는 돌봄이나 재활, 그리고 복지에 사실상 배제돼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이처럼 뇌전증 환자와 가족이 겪어야 하는 삶의 질 저하는 물론 국민 의료비와 기회비용의 증가로 심각한 사회경제적 부담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뇌전증의 예방과 진료, 그리고 연구 등 뇌전증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뇌전증 환자의 재활과 자립이 이뤄질 수 있는 지원 프로그램을 확보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관련 정책을 종합적으로 수립하고 시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인식 변화와 함께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와 지원이 가장 중요하다. 

신영인 기자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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