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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Ⅰ

  • 입력 2019.10.24 11:42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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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험한 산길로 접어들자 억새들이 하얀 꽃을 흩날리며 우리를 반겼다. 한로(寒露)를 지났으니 바람이 찼다. 토담집이 무너진 자리엔 화살나무들이 새빨간 단풍으로 치마를 지어 입었고, 생강나무들은 노란 저고리로 단장을 했다. 허물어진 흙 굴뚝은 검게 그을린 자욱이 아직 선명했다. 떠난 주인을 기다리는지 감나무는 홍시들을 주렁주렁 달고 높이 서 있었다.

전국 어디에나 사람이 산 곳에는 감나무를 기른 흔적이 있다. 이런 감나무이니, 감나무나 감에 얽힌 속담이나 옛 얘기들도 무척 많다, 말린 감인 곶감과 호랑이에 얽힌 전래동화를 비롯하여,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린다’는 등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감 껍질을 벗기고 곶감으로 만들면 오래 저장할 수도 있다. 달고 말랑한 홍시나 녹인 곶감은 치아가 부실한 노인들에게 알맞은 효도 과일이었다.

감을 소재로 한 효행 시조로 ‘반중조홍盤中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로 시작하는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조홍시가早紅?歌>가 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이 시조는 박인로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으로부터 감을 대접받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며 고사 <육적회귤陸績懷橘>에 비유하여 지은 시조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육적이 여섯 살 무렵 구강(九江)에서 원술(袁術)을 만났는데, 원술이 귤을 주자 그중 3개를 품에 넣고 작별 인사를 하다가 귤을 떨어뜨렸다. 원술이 “육적은 손님으로 와서 왜 귤을 품에 넣었는가?”라고 물었다. 육적은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가져가 모친께 드리고 싶었습니다”라 답했다한다.

달고 맛있는 감은 흉년에 배고픔을 달래주는 구황식품이라 감나무엔 인(仁) 있다고도 했다. 이렇게 인효(仁孝)를 갖춘 감나무를 나무 중의 군자(君子)라고도 한다. 감나무는 유연성이 약해, 휘어지는 정도가 한계점에 이르면 잘 부러진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니 곧은 선비를 상징하기도 했다. 감 중에서도 상투 모양인 고종시(高種枾)는 제사상에 올리지 않고 넓적한 반시(盤枾)를 올린다. 반(盤)자가 양반(兩班)의 반(班)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란다.

감나무를 군자나무라 하는데 어떤 사람을 군자(君子)라 할까? 공자(孔子)는《논어》〈이인편里仁編〉에서 ‘군자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잘 알고, 소인은 무엇이 이익인지 잘 안다. 군자는 어찌하면 훌륭한 덕을 갖출까 생각하고, 소인은 어찌하면 편히 살 것인가 생각한다’라 하였다. 그 외에도 ‘군자라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등 여러 명언이 있다. 그중에서도 “마땅히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잘못이고, 의당 침묵해야 할 때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반드시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마땅히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만 군자다(當語而默者非也 當默而語者非也 必也當而語 當默而默其惟君子乎)”라고 한 조선 인조(仁祖) 때 문장가 신흠(申欽, 1566-1628)의 명언이 떠오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양에서는 의견이 좀 달랐는데, 대문호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혀끝까지 나온 나쁜 말을 내뱉지 않고 삼켜버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료다. 언제 어떻게 말하는지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가이다. 잘못 말한 것을 후회하는 일은 많다 하지만 침묵한 것을 후회하는 경우는 없다. 더 많이 말하고 싶어 할수록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릴 위험은 커진다. “저는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더 자주 하도록 혀를 훈련하라. 등 뒤에서 나를 욕하는 이는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면전에서 나를 칭찬하는 이는 나를 미워해서다. 말의 힘은 정말로 세다. 말로 사랑을 만들 수도 적대감을 빚을 수도 있다.

서양의 이런 견해는 아마도 사람에게 충성하는 충(忠)은 있지만, 유교처럼 천명(天命)인 대의(大義)에 충(忠)을 강조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리라. 현대는 문명처럼 사상도 서세동점(西勢東占) 시대라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논어에서도 자유(子游)는 “임금을 섬기면서 간언을 자주 하면 이로 욕을 당하고, 친구를 사귀면서 충고를 자주 하면 이로 사이가 멀어진다.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라 하였다. 이는 많은 인간관계를 경험하고 통찰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임금을 섬기면서 간언(諫言)을 자주 하거나 친구에게 충고를 자주 하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간언은 윗사람에게 간곡하게 충고하는 것이기는 하나, 윗사람이 이러한 충고를 한 번 이상 들어주기는 어려울 터이다. 간언이 통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가라고도 했다.

유학(儒學)이 지배 사상이었던 동양에서는, 침묵보다는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올곧은 충언을 높이 평가하였고 사육신(死六臣)이 그러하였다. 전쟁 상황을 모르는 선조(宣祖)가 내린 무모한 진격명령을 거역하며,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선조에게 충언을 올렸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죽음을 명했다. 이때 모든 신하가 침묵하였지만, 오직 약포(藥圃) 정탁(鄭琢)만이 이순신의 몸을 건드리지 말고 자신을 죽여 달라는 충언을 올렸다. 이런 건전한 비판인 충정들이 있었기에 조선이 5백 년간 지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불행하게도 충언을 하는 이의 삶은 언제나 고난이었다.

주자는 이에 대해 “임금을 섬길 때 간언하여 행해지지 않으면 마땅히 떠나야 하고, 친구를 인도할 때 좋은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마땅히 그만두어야 한다. 깔끔하지 못하고 번거로운 상황이 되면 말하는 사람은 경망스러워지고 듣는 사람은 싫증 나게 된다. 그래서 올바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도리어 모욕을 당하게 된다”고 견해를 밝혔다.

군자란 말이 생길 무렵인 춘추시대에는 군자란 곧 관리를 의미했다. 요즘으로 치면 공직을 의미한다. 군자로서 관리가 가장 해서는 안 될 일로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만드는 위인설관(爲人設官)을 들었다. 요즘은 심지어 자기 자신이나 패거리를 위해 자리를 새로 만드는 일이 허다하다. 요즘 정치권에서도 한 장관 자리를 두고 여야는 물론 민심들까지 갈라져 있다. 같은 진영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옳고 그름보다 같은 편이냐가 중요하고, 비판 목소리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혹여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 X맨이라 부르며 매장되기도 한다.

내 진료실 앞 공터에도 감이 발갛게 익어가고 있다. 홍시가 한창 맛있을 ‘때’를 알고 지바퀴들이 감나무 단풍 사이로 설쳐댄다. 논어에서는 충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때’를 보아 다른 나라로 가라고 했다. ‘때’를 아무리 보아도 다른 나라로 갈 데도 없고 뿌려놓은 씨가 많아 조직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떠날 곳이 없는 이들을 위해 맹자(孟子)는 분명한 답을 주었다. 떠날 게 아니라 나라에서 버릴 수 있는 순서로 “백성이 근본이고, 주권이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 民爲本, 社稷次之, 君位輕”고 했다. 건전한 비판을 용납 못 하고, 한목소리만 바라는 국가나 조직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모처럼 세간에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나라나 공적인 조직에 충성한다”는 올곧은 선비의 말도 들린다. 감나무 밑에서 잘 익은 홍시를 주운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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