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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신 휘프노스와 ‘수면제’
  •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 승인 2019.10.2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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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수면제, Hypnotica라는 용어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잠(睡眠)의 신 휘프노스(Hypnos)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와는 형제 사이다. 휘프노스 자신은 언제나 졸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 마음씨 착한 청년 신이어서 피로한 사람에겐 휴식을 주어 괴로움과 고민을 덜어주는 조용한 존재이다. 그림에서는 대개 두 귀의 뒤쪽에 날개가 달린 형상으로 그려진다.

휘프노스 신과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가 관련되는 아름다운 신화가 있는데 그것은 케육스와 할큐오네라에 관한 신화이다.

옛날 명마(名馬)의 산지인 테싸리아에는 케육스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금성 헤르페로스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왕의 형이 죽자 여러 가지 괴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므로, 왕은 생각다 못해서 아폴론의 신탁을 받으러 먼 여행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 할큐오네(바람의 신의 딸)는 한사코 남편의 여행을 말렸다.

그러나 왕은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배를 타고 먼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여정의 반쯤 가서 배는 폭풍을 만나 파선되고 왕과 부하가 전부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정숙한 아내는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날마다 헤라 여신에게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빌었고, 남편이 객지에서 딴 여자와 바람피우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었다.

헤라 여신은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날마다 자기에게 빌고 있는 할큐오네가 가엾어서 하루는 무지개의 여신인 이리스를 불러 “이리스야, 잠의 신인 휘프노스한테 가 할큐오네에게 꿈을 보내어, 그 꿈속에 케육스가 나타나서 자기의 죽음을 아내에게 알리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는 헤라의 명을 받고 일곱 빛깔의 예쁜 옷을 입고 휘프노스의 궁전으로 내려갔다. 킴메리오이라는 종족이 사는 나라 근방에 있는 산의 동굴이 휘프노스의 궁전이었는데 태양이 비치는 일이 없고 구름과 희미한 광선이 어렴풋이 비칠 따름이었다. 바위 밑에는, 그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잠이 오는 「레테」(忘却)의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삼라만상이 잠들까 봐 오로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궁전의 입구에는 양귀비(아편)와 수면초, 그리고 상추 같은 약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런 약초의 즙(汁)을 내어 모았다가 잠의 신은 어두워진 지상에 뿌려 잠들게 하는 것이었다. 궁전에는 문이 없다. 문이 있으면 열리고 닫힐 때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궁전 안에는 잠의 신이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는데, 이리스 여신이 발소리를 죽이며 들어서자 잠의 신이 졸음에 겨운 눈으로 또 긴 턱수염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의 주위에는 형형색색의 꿈들이 가로 놓여 있었는데 그 수효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또는 숲속의 나뭇잎만큼이나 많았다. 무지개의 여신이 그의 주위에서 배회하는 꿈들을 쓸어버리자 무지개의 빛이 동굴 안에 환하게 가득 찼다. 깊은 잠에서 깬 휘프노스에게, 이리스는 “신 중에서도 가장 점잖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고뇌에 지친 마음을 위안시켜 주는 휘프노스여, 헤라 여신의 부탁이, 당신은 트라키아 마을에 사는 할큐오네에게 꿈을 하나 급히 보내 그녀의 남편과 난파선이 겪은 모든 사건을 알리라는 분부입니다”라고 전했다.

▲ ‘휘프노스와 타나토스’가 그려진 크라테르

휘프노스는 그의 많은 아들 중에서 사람의 형태나 말씨나 태도를 가장 흉내 잘 내는 모르페우스(Morpheus)를 불러서 헤라 여신의 분부를 이행하도록 시켰다. 이렇게 해서 잠의 신의 아들은 잠자고 있는 할큐오네 부인에게 그녀의 남편 모습으로 나타나서 파선되어 죽은 사연을 연출했다.

잠에서 깨어난 할큐오네는 남편의 죽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남편이 떠나던 바닷가로 나가서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있었는데, 무엇인지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물결을 따라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사람의 시체인 것 같은데, ‘누구의 시체일까 봐 불쌍도 해라’ 하면서 더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그것은 분명히 자기 남편의 시체이었다.

바닷가에는 높은 방파제가 구축되어 있었는데 할큐오네는 그 높은 방파제를 쉽사리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는 높이 날아보았더니 순식간에 날개가 생기며 새(鳥)로 변신한 것이다. 공중을 날아서 시체 가까이 갔다. 그리고는 슬픈 목소리를 내었는데 그 목소리는 슬퍼하는 사람의 울부짖음이었다.

시체에 다가선 새는 자기의 나래로 싸늘한 시체의 손발을 감싸고 딱딱한 부리로 시체에다 키스하듯이 쪼아대었더니 시체는 고개를 드는듯하다가 한 마리의 새로 변해서 하늘로 높이 솟아 올랐다. 두 마리 새는 정답게 지저귀며 바다 너머로 날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중세 이전의 옛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호모투트스’라 해서 몸과 영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마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상태로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것이 죽음에 대한 개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는 잠을 자는 것으로 해석했으며 죽음에 대해 겁을 내지 않고 담담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죽음의 개념에서 탄생한 것이 휘프노스, 타나토스 신화이며,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죽음의 위상을 확실히 한 것을 여러 크라테르(krater)에서 볼 수 있는데 휘프노스는 언제나 잠이 모자라 자고 있는 채로 끌려오고 있으며, 타나토스는 말끔히 정장하고 죽을 자를 다리로 갈 차비를 차린 것으로 그려진다.

휘프노스와 타나토스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에서 옛 그리스인들의 잠과 죽음에 대한 개념은 휴식이라는 관점에서 공통적인 개념을 갖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즉 모든 활동을 정지하고 휴식하는 것이 바로 잠과 죽음이 지니는 공통점이며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죽음은 그 시간적인 한계가 영구적이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과 친숙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었다. 단지 유한한 인생을 가능한 한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다.

▲ 워터하우스 작: ‘잠과 그의 형제 죽음’, 1874. 개인 소장

또 19세기 영국의 화가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1)가 그린 ‘잠과 그의 형제 죽음(1874)’도 신화에 나오는 잠의 신 휘프노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에 관한 것이다.

휘프노스와 타나토스는 형제간으로 그들의 어머니는 밤의 여신 나스로이다. 두 아들은 그 피부의 빛깔이 달라서 동생인 휘프노스는 흰색인데, 형 타나토스는 검은색이었다. 어머니인 밤의 여신이 검은 날개를 펴면, 세상은 깊은 어둠 속에 빠지게 되어 지상의 만물은 잠을 자게 된다.

그림 ‘잠과 그의 형제 죽음’은 이 두 형제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빛을 받아 흰색 피부가 더욱 희게 보이는 휘프노스는, 검은 피부색이 그림자에 가리어 더욱 어둡게 보이는 타나토스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지만 함께 깊은 잠에 빠져있다.

휘프노스는 양귀비꽃을 품에 안고 있는데 양귀비는 아편 즉, 모르핀의 원료로서 통증 환자에게 모르핀을 투여하면 진통과 더불어 깊은 잠에 들기 때문에 휘프노스를 상징하는 꽃이라 할 수 있다.

신화에 나오는 휘프노스는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최면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데, 이 지팡이에 닿으면 모든 생명체가 깊은 잠에 빠지지 않고는 도저히 배기지 못한다. 그래서 수면제는 히프노티카 Hypnotica, 최면술을 히프노티즘(hypnotism)이라는 것도 잠의 신 Hypnos에서 유래되었으며, 로마 시대에 이르면 휘프노스는 솜누스(Somnus)로 그 이름이 바뀐다. ‘불면증’을 뜻하는 영어 ‘인솜니아(insomnia)’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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