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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Ⅱ

  • 입력 2019.11.14 12:02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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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언덕배기 곰보할머니 집 지붕 위에 수많은 발간 등불이 켜졌다. 감국 꽃이 샛노랗게 빼곡한 비탈엔 잉잉거리는 꿀벌들 소리가 요란하다. 열매를 다 떠나보낸 빈 옥수수대궁들은 울타리에 기대어 서걱서걱 마른 잎들만 비벼댄다. 빨간 고추들이 다투어 말라가는 돗자리만한 앞마당에는 봉당 수수비로 쓴 자욱이 선명하다. 정갈한 마당엔 발간 등불 같은 홍시들이 소복이 떨어져 있지만, 무남독녀 집에 가셨는지 할머니는 안 계신다.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나무를 대라면 나는 감나무를 대겠다. 전국 어딜 가나 집이 있었던 곳엔 감나무가 있다. 우리 선조들은 집 주변에 여러 과일나무를 가꾸었다. 가장 가까운 마당가에 감나무를 심었고 밭둑에 대추나무를, 야산 자락에 밤나무를, 숲속에 돌배나무를 즐겨 심었다. 이 나무들은 제사상의 맨 앞 과일 줄에 올라가는 조율이시(棗栗梨枾)로서 꼭 챙겨야 할 과일나무다.

감나무는 움이 늦게 튼다. 감나무에 겨우 새순이 나오면 이미 봄이 진달래와 개나리는 꽃을 만개했을 때다. 그렇지만 감나무도 괜히 늦은 게 아니다. 두툼한 새싹에는 이미 꽃은 물론 작은 씨방까지 준비되어 있으니 대기만성(大器晩成)인 셈이다. 대기만성은《노자(老子)》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만성(晩成)’이란 더디게 만들어져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로,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후대에 와서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노자의 지혜로운 말을 들어보자.

우수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한다. 중간 정도의 사람은 도를 들으면 어찌할지 망설인다. 못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웃어 버린다.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할 터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어 왔다. 매우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것 같다. 가장 평탄한 도는 굽은 것 같고, 가장 높은 덕은 낮은 것 같다. 가장 넓은 덕은 한쪽이 이지러진 것 같고, 아주 건실한 도는 빈약한 것 같고, 매우 질박한 도는 어리석은 것 같다. 아주 흰 빛은 때가 낀 것 같고, 아주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는 것 같고, 큰 그릇은 더디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 아주 큰 소리는 들을 수 없는 것 같고, 아주 큰 형상은 모양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도는 크면서도 형체와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 대저 도는 만물을 돕고 이루게 해 준다(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 上德若谷.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 大白若辱, 大方武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이 중에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큰 도(道)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도가 낮은 나로서는 분명히 그렇다고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 역사를 통해 수많은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510년 천동설(天動說)을 부정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가 그러했고, 기원전 5세기경에 마음이 심장(心臟)에 있지 않고 뇌(腦)에 있을 거라고 예견했던 히포크라테스가 그러했다. 또한, 가깝게는 한국전쟁 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그러하였다.

위의 예처럼 세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예도 있었지만, 분명 진리, 즉 도(道)인 줄 알았지만, 주변의 비난을 뚫지 못하고 실패한 예가 더 많았다. 이에 대해 성공하는 방법을 제시한 한 조선의 선비가 있었다. 18세기 조선 문장론의 선두에 섰던 조구명(趙龜命)은 ‘아무리 높은 뜻과 진리를 알고 있더라도 이를 추진할 식견과 역량이 없다면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당나라 한유(韓愈)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대책으로 제시하였다.

세상의 추이를 따르기만 하고 자기 뜻을 세우지 않는다면, 당시에는 거부감을 주지 않겠지만 후세에 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워할 점은 있다.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는 것은 뜻이고, 세상의 책무를 이루는 것은 역량이며, 세상의 이치에 부합하는 것은 식견이다(若與世況浮 不自樹立 雖不爲當時所怪 亦必無後世傳也, 雖然 猶有所懼焉 夫犯天下之難者 力量也 合天下之理者 見識也/고전의 視線, 송혁기).

대기만성으로 새로 돋은 가지에만 감꽃은 6월 초에야 핀다. 두툼한 감꽃은 먹으면 상큼하고 달짝지근하며 약간 떫은맛이 난다. 밤새 떨어진 감꽃을 한 바가지 주워 종일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감의 종류에 따라 모양이 제각각인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기도 했다. 감꽃에는 꿀이 많아 큰 감나무에는 벌들이 많이 모여들어 윙윙거리는 소리가 천군만마처럼 들리기도 한다.

감나무를 ‘말하는 나무’라고도 한다. 감꽃에 모이는 꿀벌 소리 말고도 감나무가 말하는 나무인 이유가 있다. 뒤란에 잘 익은 감이 많이 열리면 밤새 감나무에서 소리가 그칠 새가 없다. “뚝”하는 덜 익은 감 떨어지는 소리와 “철석”하고 홍시 떨어지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다 바람이라도 불면 “딱”하는 가지 꺾이는 소리까지 들린다. “뚝”, “철썩”, “딱” 소리에다 짐승들이 홍시 따 먹는 소리까지 합세하니 조용할 때가 없다.

감나무 품종은 열매가 맺기 전에는 알기 어렵고, 잘 익은 감은 모양도 여러 가지다. 옛적에는 홍시가 되기 전에 큰 감이 떨어지면 물속에 약 5일 담그면 떫은맛이 없어지는 데 이를 침수(浸水) 감이라 했다. 달짝지근하고 약간 말랑하여 간식으로 먹었다. 어떤 종류의 감나무이든지 감 씨를 심으면 모두 고욤나무 싹이 나고 만다. 이는 중국원산인 감나무가 가지의 돌연변이를 이용하여 접목을 통해 개량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이다. 감잎으로 차를 달여 먹기도 하고, 옷감에 물감을 들이기도 한다. 덜 익은 감에 많은 타닌산은 떫은맛으로 짐승들이 익기도 전에 감을 따 먹지 말라는 경고일 성싶다. 타닌산은 천연지사제로 설사 증상을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많이 먹으면 심한 변비를 일으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감나무 목재는 무늬가 아름답고 가공하기 쉬워 고급가구 재료로 인기가 높다. 재질이 검고 단단하며 결이 곱다. 문갑 같은 고급 세공물(細工物)을 만드는 데 쓰이며, 과거에는 골프채의 헤드로 널리 쓰였다. 열대지방에도 감나무 무리가 자라고 있으나 온대처럼 큰 과일을 맺지는 않는다. 이 중에서 흑단(黑檀, ebony)이란 나무는 마치 먹물을 먹인 것처럼 나무속이 새까맣다. 흑단은 독특한 색깔 때문에 멀리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침상가구에서부터 오늘날 흑인의 얼굴을 새긴 조각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고급 목재다. 그러나 감나무 목재는 내구성이 약하여 집을 짓는 목재로는 쓸 수 없다.

가을이면 인상파 화가들의 점묘화처럼 커다란 감잎에 울긋불긋 단풍이 든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단풍잎 사이로 발간 홍시 등불들이 더 많이 켜진다. 그러다 입동(立冬)을 지나면 앙상한 가지에 몇 개의 등불만 켜져 있고, 춥고 배고픈 까치들은 까치밥으로 허기를 달랜다. 감나무 밑 서리 맞은 감국은 더욱 샛노래지고 곰보할머니는 대발에 감을 썰어 말린다. 외손자 줄 까치밥이다. 종류를 불문하고 감 씨를 심으면 고욤나무가 나듯이, 시골을 떠나 온 지 오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내 정서는 시골에서 움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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