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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정신치료 제2막

  • 입력 2020.03.03 11:02
  • 기자명 전현수(송파 전현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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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그러다 2002년, 어떤 책을 읽게 됐습니다. <바로 이번 생에>라는 책입니다. 미얀마의 저명한 불교 스승 가운데 마하시 스님이 계시고, 마하시 스님의 으뜸 되는 제자가 우빤디따 스님입니다. 그분이 미국 통찰명상회(IMS)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3개월 동안 서양 수행자들에게 법문을 했는데, 그걸 정리한 책이 바로 <바로 이번 생에>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저는 위빠사나 수행을 좀 우습게 봤습니다. 불교라는 건 엄청나게 오묘하고 싶은 건데, 그냥 몸과 마음 관찰해서 어떻게 불교의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책에는 순간순간 몸과 마음을 관찰해서 삼법인(三法印), 즉 무상[제행무상(諸行無常)], 고[일체개고(一切皆苦)], 무아[제법무아(諸法無我)]를 깨칠 수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삼법인의 내용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무상(無常)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무상하다,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순간순간 계속 변한다는 것이 괴로움[苦]입니다. 이것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가르침이지만, 본질적으로 볼 때 변한다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변하고, 그래서 괴로운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 몸과 마음을 우리는 눈곱만큼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아(無我)입니다. ‘내가 없다’는 게 무아가 아니라 몸과 마음에서 우리가 통제 가능한 것이 없다는 게 무아입니다.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리는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이든 뭐든 그 모든 것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순간순간 몸과 마음을 관찰해서 삼법인을 알 수 있음을 우빤디따 스님이 경전과 주석서에 입각해 책에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위빠사나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위빠사나 책들을 많이 읽었고, 주위 분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고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미얀마로 가라고 말씀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미얀마에 가서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머리 깎고 스님 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7월에 미얀마에 갔습니다. 양곤에 있는 참메명상센터에 가서 머리 깎고 비구(남성 승려)가 됐습니다. 거기서는 아침에 눈 떠서 밤이 되어 잠들 때까지 몸과 마음을 관찰합니다. 법당 안에서는 걷기 명상과 좌선 두 가지를 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합니다. 걷기 명상은 항상 한 시간이고, 좌선은 앉아 있을 수 있는 데 까지 합니다. 좌선에서는 등이 굽었을 때 펴는 것은 되지만 다리를 바꾸거나 하는 건 못합니다. 예를 들어 다리가 저리다면 처음엔 그저 관찰합니다. 그래도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으면 일어납니다. 일어나서는 걷기 명상을 한 시간 합니다. 걷기 명상이 끝나면 다시 좌선을 합니다. 법당 안에서는 걷기 명상과 좌선을 번갈아 가며 합니다. 법당 문을 나서서는, 일상 행위 관찰이라 해서 행동을 천천히 하면서 모두 관찰합니다.

참메명상센터에 가서 처음에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보고 살아온 것 같은데 이걸 왜 해야하지?’ 그래서 우 소비따 스님이라고, 저를 지도해주신 분께 매일 물었습니다. “이거 왜 해야 합니까?” 그러면 돌아오는 답이 “To know!”예요. 알기 위해서 한다는 거지요. 다음 날 또 가서 물어도 답이 같았습니다. “To know!” 그러기를 일주일, 좌선 중에 통증이 느껴지는데 세포 하나하나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세포마다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데, 몸이라는 것이 이전까지의 제 생각과 달리 나에게 소속은 되어 있지만 나와 전혀 무관한 어떤 거대한 세계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 무아구나!’ 하고 제 나름으로 체득한 거죠.

이런 경험을 하라고 관찰하라 했다는 걸 알고서는 더는 묻질 않았습니다. 이후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무상, 고, 무아를 나름대로 체득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치료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라는 게 이런 속성을 가졌구나.’ ‘환자가 왜 병이 났는지 알겠다.’ ‘병을 낫게 하려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고 말이지요.

이후, 아는 스님의 주선으로 미얀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쉐우민명상센터의 우 떼자니아 스님과 한 시간 정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쉐우민명상센터는 마음을 보는 수행을 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우 떼자니아 스님은 젊은 분이긴 하지만 쉐우민명상센터를 이끄는 스님입니다. 스님을 만나서는 몇 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정신치료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우 떼자니아 스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환자가 자기 문제를 자꾸 반복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며,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스님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환자가 자기 스스로를 보게끔 도와주세요.” 그 말을 듣고 가만 보니, 이전까지 저는 치료현장에서 환자가 자기 스스로를 보게끔 하는 데 초점을 맞춰서 치료를 하지는 않았더라고요. 사실 환자가 저하고 보내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두 시간밖에 안 되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스스로 보내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 시간에 자기 스스로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요. 정신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걸 도와줘야 합니다. 우 떼자니아 스님 말씀이 제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관찰을 통해 몸과 마음의 속성을 아는 것이 환자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는 깨달음을 얻어 불교정신치료의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익진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불교 공부는 길을 잃었지만 불교 경전을 원문으로 읽기 위해서 먼저 1년 반 정도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고, 이후 빨리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불교학과 교수들과 초기경전(니까야)을 빨리어로 읽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미얀마에 가게 되었고, 몸과 마음 관찰이 엄청난 이들을 준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불교 공부와 수행에서 길을 잃었고, 할 것은 이것뿐이다.’ 그 후 지금까지 저는 몸과 마음을 늘 관찰합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탁 스톱하고 현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제가 불교인이 지켜야 하는 다섯 가지 계율(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않는다,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부정한 정교를 맺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2003년 7월부터 계속 몸과 마을을 관찰했습니다. 그러면서 저 나름대로 많은 걸 깨달았고 별로 의문이 없었어요. 의문은 없었지만, 2007년에서 2008년까지 2년에 걸쳐서 환자 보는 거 외에 다른 일은 거의 안 하고 4부 니까야 읽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그 목적은 부처님의 주된 가르침은 무엇이며 그 가운데 제가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을 파악하고, 불교가 과연 심리학이나 정신치료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니까야를 읽고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토대는 인과 법칙이라는 것과, 이과 법칙에 의해서 우리는 무아이면서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이런 가르침을 터득하고 실천한다는 목표를 향해 불교의 모든 수행법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구중에서 많은 것을 제가 몸과 마음 관찰하면서 터득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윤회의 과정 또는 윤회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 선정을 닦고 그 다음에 윤회의 실상을, 그러니까 생과 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봐야겠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미얀마의 파욱숲속수행센터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9년도에 병원 문을 닫았습니다. 선정을 닦고 파욱수행을 하는 데 2년이면 된다기에 그 정도기간 동안 병원을 쉴 계획을 잡았습니다. 이때는 미얀마에는 못 가고 말레이시아와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선정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고서는 선정 수행이 저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 병원 문을 다시 열었습니다. 복귀해서는 니까야 가운데 읽지 못한 부분을 마저 읽었습니다.

니까야를 다 읽고 난 다음 우연한 기회에 수행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경험을 하고 다시 수행에 도전할 수 있겠다 싶어, 2013년 11월에 다시 병원 문을 닫고 선정 수행에 도전해서 성공했습니다. 선정을 닦으면 지혜의 눈이 열립니다. 지혜의 눈이 열리면 우리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궁극적인 물질과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 가능한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미래는 변화 가능하지만) 내가 이 상태로 간다면 언제 죽어서 몇 살에 어디서 죽고 다음 생은 뭐가 되는지를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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