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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미친 사람 얼굴의 두 표정

  • 입력 2013.09.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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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미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단순해 그들의 얼굴에서 사람의 표정을 없애고 야만스러운 얼굴로 표현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하등동물의 모습을 기초로 한 어리석음, 잔인성, 흥분성, 경계성, 겁먹은 표정 등을 사람의 얼굴에 옮겨 이것을 미친 사람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의학이나 예술 분야에서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보다 복잡해졌다.

그것은 의학이 발달되고 화가들에게도 의학적 지식이 보급됨에 따라 정신장애자의 표현에도 변화가 생겨 미친 사람의 외형에 나타나는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그림과 미친 사람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그림의 두 형으로 나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실레(Egon Schiele 1890-1908)가 그린 ‘에두아르 코스마크’(1910)라는 그림은 그의 친지 코스마크를 그린 것으로 그의 얼굴 모습에서 정신과 치료가 곧 필요할 정도로 위급성이 보인다. 코스마크는 최면술을 잠시 시도해 본 적이 있다는 그의 이력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듯싶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시선으로 눈을 크게 부릅뜨고 관객들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정신이상자의 외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마치 무엇인가 중요한 결심을 한 듯이 보이고 매우 공격적인 표정으로 보아 가학증 환자가 어떤 공격적인 행동을 곧 시작할 것 같은 표정으로 이런 표현이 미친 사람의 외형적인 표현이다.

사람이 충격적인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인내하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으로서 그 인내의 한계를 넘으면 자살까지도 생각하게 된다.

벨기에 출신의 유명한 상징주의 화가 크노프(Fernand Khnopff 1858-1921)가 그린 ‘나는 나를 가둔다’(1891)라는 작품에는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충격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화가의 여동생을 그린 것인데 오빠로부터 능욕을 당하고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으로 그림 앞의 꽃이나 배경의 장식 모두가 쓸쓸함과 아련함을 더해준다.

특히 여인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눈의 표정은 흰자위가 눈의 태반을 차지하고 동자는 위로 몰려있어 영락없는 정신병자의 눈이다.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차 무거워진 머리를 깍지 낀 손가락 위에 올려놓고 있어 머릿속의 괴로움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태임을 표현하고 있어 어떤 정신장애가 발증(發症) 하고 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가 궁금해진다. 화가는 여인 뒤쪽에 잠의 신 히프노스의 두상을 그려놓았다. 머리에 날개가 달린 그 조각상은 그림 속의 여인을 잠의 세계로 인도 할 것을 암시하는 듯싶다. 즉 잠의 신을 따라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잠의 세계로 향할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미친 사람의 내면세계를 잘 표현한 그림을 보기로 한다. 화가 게르스틀(Richard Gerstl 1883-1908)의‘웃는 자화상’(1908)을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표현주의적 심리묘사가 뛰어난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림의 주인공인 화가는 웃고 있지만 그림을 보는 관자들의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을 느끼게 하는데 그것은 그 웃음이 밝고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릴 때의 나이 25 세로 저명한 작곡가 아르놀트 쉰베르크의 아내 마틸드와 사귀고 있었다.

유부녀와의 사귐이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사랑의 미로에서 헤매이던 마틸드는 방황 끝에 남편에게로 돌아갔고, 주위의 비난과 무섭게 느껴지는 자책감과 고독에 직면한 게르스틀은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고민과 처량함, 서글픔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러한 심리적 좌절감에 사로잡혀 웃고 있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웃음에 오히려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즉 화가는 자기의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내면적인 고뇌를 웃음으로 표현하였다. 모름 직이 이때쯤 해서는 정신적인 장애가 발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화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단 발병되면 끝이 없는 고통을 받게 되며 마치 산다는 것이 인생의 형무소에서의 생활하는 것같이 느껴지며 일종의 지독한 고문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상시의 마음가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서운 낭떠러지에 추락하고 마는 것으로 결국은 험한 곳에서 헤어날 수가 없어 자살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화가 제리코 (Theodore Gericault 1791-1824)는 운동감이 강한 감정의 표현이 능한 화가로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제리코는 말년에 10점의 미친 사람의 그림을 그렸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5점 뿐이다. 그 중에서 이 작품 ‘미친 여자’(1819-22)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한동안 이 그림이 매우 낮게 평가된 적도 있었는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의 무의식과 실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그 심리 묘사가 뛰어난 것이 재평가되면서 일약 명화의 대열에 끼우게 되었다.

늙고 고집스럽게 생긴 이 여인의 얼굴은 창백하면서도 누런 빛을 띄고 있어 황달기가 있는 것으로 보여 한눈에 환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시선은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어 매우 날카로운 눈매를 보이는 한편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무엇인가에 신중하여야겠다는 결의에 불타고 있는 듯이 보인다. 눈알은 붉게 충혈 되어 있어 그 눈에 비친 세상은 모두가 바로 보일 것 같지가 않아 원망스러운 세상에 대한 반격을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매우 긴장하고 있으며 그 긴장된 내면의 움직임은 붉게 충혈 된 눈에서 읽을 수 있고 그녀가 입고 있는 붉은 옷을 통해 다시 강조된다. 강인한 의지를 나타내는 입술 주위와 미간의 주름은 그녀가 그간 자기를 지키기 위해 힘겹게 노력한 흔적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보면 한 인간이 인간인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듯하다.

정신병 환자를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병의 환상을 나타내는데 정상적인 화가의 경우와 화가 자신이 정신적인 충격을 지니고 이를 표현하는 것 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 병리의 내적인 문제를 예술적으로 가시화 하는데 있어서 그 작품의 이미지의 배후에는 특수한 테마를 환기시키는 이미지가 있어 내적 상태의 표현에도 어떤 척도가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장애를 지닌 화가가 자기의 자화상을 표현하는 데는 보편적이고도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표현되며 정신 장애라는 것을 특별히 신경 써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웃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을 우리는 보았다.

개인의 이력으로 보아 제리코는 정신장애가 없었던 화가이다. 그러면서도 정신 장애자의 그림을 10장이나 그렸다. 그러나 게르스틀은 미칠 것 같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목숨을 끊기 직전 상태를 그렸다. 즉 화가가 정신장애자와 완전히 동질화된 상태에서의 표현이다. 이제 두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게르스틀의 자화상의 얼굴은 다소 야위고 깨끗지 못한 점은 있으나 그래도 웃고 있으며 그 웃음에는 복잡한 심정으로 인생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웃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눈의 초점은 다소 흐려있어 제리코가 그린 ‘미친 여자’의 눈과는 전연 다르게 보인다. 또 세상을 원망하는 듯한 그런 표정은 가려져있고. 내면에서의 긴장감 같은 움직임은 전연 없는 것 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깍지 않은 수염에서 그의 장기간의 인생고민을 실감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어 정신장애의 외면을 묘사한 그림과 그 내면을 표현한 그림 간에는 눈의 표현에 있어서 이렇듯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