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OPINION 전문가 칼럼
산수유
  •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 승인 2020.03.26 12:02
  • 댓글 0

[엠디저널] 된서리가 내린 자그만 산사 뜰에서 누군가가 마치 “이리 와서 날 좀 봐주세요!”하고 외치고 있다. 갸름한 얼굴에다 터질 듯한 선홍색 살결이다. 가을이 깊어 감나무의 홍시들은 까치들에게 보시하느라 온전한 것이 없고, 일주문 앞에서 반기던 접시꽃들의 접시는 온 데 간 데가 없다. 그러나 산수유 마른 나뭇가지에는 앵두만 한 열매들이 다투어 매달려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런 산수유에 얽힌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밭에서 “임금님 귀는 나귀 귀!”라는 말이 들려온다는 설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가 난 임금이 그 대밭을 베어 없앤 후에 어떻게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신라 제48대 경문왕은 왕위에 오른 후 귀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왕은 이 사실을 숨겼고, 이를 아는 이는 다만 왕의 복두장(?頭匠, 두건을 관리하는 장인)뿐이었다. 복두장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 비밀을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현실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복두장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그는 도림사(道林寺)라는 절의 대밭 속으로 들어가, 대나무를 향하여 “우리 임금님 귀는 나귀 귀다!”라고 소리쳤다. 그 뒤부터는 바람이 불면 대밭으로부터 “우리 임금님 귀는 나귀 귀다!”는 소리가 났다. 화가 난 왕은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그 자리에 산수유를 심게 했으나 그 소리는 여전하였다고 한다.

임금님 귀가 나귀 귀라는 설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온다. 소아시아 반도의 프리지아(Phrygia)의 왕 미다스(영어로는 마이더스)에 관한 얘기다.
미다스왕은 신에게 손에 닿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빌어 소원을 성취했다. 그 이후 그런 손을 미다스의 손이라고 한다. 음식도 손에 닿으면 황금으로 변해 먹을 수 없어 곤란해진 미다스는, 원래대로 그렇지 않게 해달라고 또 빌어 그 소원도 이루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 간 곳에서 반인반수(半人半獸)인 대지의 신(神) 판(Pan)을 모셨다.

판은 자신의 피리 연주 솜씨를 자랑하던 끝에, 무엄하게도 아폴론 신(神)과 피리 연주 대결을 하게 되었다. 결과는 아폴론의 승리였으나, 미다스왕은 판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화가 난 아폴론이 그의 귀를 나귀 귀로 만들었다.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귀를 가졌으니 귀를 키워 제대로 들으라는 뜻이었다. 왕의 귀가 커진 줄은 아무도 몰랐으나 왕의 이발사만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지 못해 구덩이를 만들어 비밀을 털어놓은 후 메웠다. 이후 그곳에서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났다. 갈대밭이 흔들릴 때마다 이발사가 털어놓은 말인 “임금님 귀는 나귀 귀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임금님 귀가 나귀 귀’라는 설화는 북반구에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프랑스, 루마니아, 러시아, 그리스, 아일랜드, 칠레와 같은 지역에선 말이나 산양(山羊)의 귀가 나귀 귀를 대신하기도 한다. 여기서 나귀 귀는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뜻이라 한다. 경문왕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그는 국운이 저물어가는 신라 말기에 등극하였다. 6두품이나 백성들 편에 선 개혁 군주였으나 30대 초반에 의문의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였다. 경문왕이 뱀들과 같이 자며 귀가 자란다는 등의 소문은, 그의 개혁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꾸며낸 저항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기서 뱀들은 6두품을 뜻한다고 한다. 경문왕의 귀가 자란다는 뜻은 귀가 커져서라도 남의 애기를 잘 들으라는 뜻이며, 나중에 정권을 잡은 개혁에 반대하는 측에서 경문왕을 음해하려 꾸며냈다는 해석이 있다.

산수유 나무


경문왕 때 도림사 앞 갈대를 베어낸 자리에 하필이면 왜 산수유나무를 심었을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신라 시대에도 산수유나무 과육(果肉)은 만병통치약으로 통했고 보혈 강장제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따라서 수요가 많았을 터이고, 만병통치약이었으니 일종의 액땜 역할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최근에도 TV 등 매스컴에서 중년을 지난 한 남성이 어눌한 말로 빙그레 웃으며 “남자한테 좋은데! 참 좋은데!”하는 선전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산수유과육에 코르닌(cornin)이라는 배당체 성분의 효과 때문이다.

이 코르닌(cornin) 성분은 부교감신경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를 이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인체에는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도 없으나 알아서 저절로 장기의 기능을 알아서 조절하는 신경이 있는데 이를 자율신경이라 한다. 자율신경에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있다. 교감신경은 주로 낮에 활동할 때 각성상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반대로 부교감신경은 밤에 잘 때처럼 주로 휴식을 취할 때 작용이 활발해지는 신경이다. 부교감신경이 인체를 지배하는 신경이 되는 새벽에는 사내아이들 고추가 서는 이치처럼, 코르닌이 부교감신경을 활성화되는 효과가 바로 “남자한테 참 좋은데!”라는 말의 근거라 할 수 있다.

산수유는 봄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린다. TV 뉴스에서도 흔히 산수유 꽃으로 봄소식을 알린다. 산수유는 잎도 피기 전 마른 나뭇가지에 노란 꽃망울들로 층층이 피어 목걸이를 걸어놓는다. 산수유는 한국과 중국이 원산지인 층층나무과의 낙엽교목이다. 열매는 타원형의 핵과(核果)로서 처음에는 녹색이었다가 8~10월에 붉게 익는다. 종자는 긴 타원형이며 능선이 있다. 약간의 단맛과 함께 떫고 강한 신맛이 난다. 10월 중순의 상강(霜降) 이후에 수확하는데, 육질과 씨앗을 분리하여 육질은 술과 차 및 한약 재료로 사용한다.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과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경상북도 의성군 등에 산수유로 유명한 마을들이 있다.


경쟁이 치열하고 복잡한 오늘날에는 복두장이나 이발사와 같은 처지에서 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 두려움은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는 최고 비밀이다. 그 비밀을 안다는 사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두렵다. 그 두려움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며, 이성적으로 대처한다 하여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들이 두려움의 원인을 인식한 후에는 두려움은 실존하는 문제가 되었다. 현대 심리학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구분하고 있다. 두려움은 다행히 원인을 제거하면 원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한다. 그러나 불안은 좀 다르다. 불안은 그 요인이 막연하고 제거할 수도 없다 한다. 적응하며 살아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대사회에서 불안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두려움과 불안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설화처럼 그 옛날에도 정치를 하는데 소통이 문제였고 어려웠던 모양이다. 왕이라도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니, 말을 잘 듣게 귀가 커지는 형벌을 받거나 귀가 커진다고 모함을 받았다. 남의 말을 하기는 쉬워도,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무척 어렵다. 중국 제(齊)나라의 자라소는 추남이면서 척추장애인인 총각이었다. 그런데 처녀들이 그를 한 번 보기만 하면 서로 시집가겠다고 줄을 섰다고 한다. 장자(莊子)가 그 총각을 찾아 연유를 물었더니 총각이 처녀들 얘기를 잘 들어주었을 뿐이라 답했다고 한다. 내년 4월 산수유가 핀 후에 총선(總選)이 있다. 현재 살기 어려워진 한국백성들은 복두장이나 이발사보다 몇 배나 많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할 말들이 많을 성싶다. 그렇다면 의원 후보 중에서 제나라 총각처럼 백성들 얘기를 잘 들어주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을까? 후보들은 내년 이른 봄 산수유가 온 천지를 노랗게 물들인 마을에 가서 들릴지도 모를 진정한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md@mdjournal.net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