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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똥나무와 올리브나무

  • 입력 2020.03.27 09:00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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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끝자락을 걷다가 재스민향보다 더 상큼한 향기에 이끌려 장미울타리로 갔다. 활짝 핀 덩굴장미에 코를 갖다 댔다. 장미향이 났다. 나를 이끈 그 향기가 아니었다. 그 향기가 나는 곳을 따라 장미 넝쿨 밑으로 몸을 낮추었다. 코가 닿은 곳은 쥐똥나무 울타리였다. 각(角)이 지게 잘라버린 울타리 안에 단 한 떨기의 꽃이 숨죽이고 있었다. 진한 향이 났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수수꽃다리 모양의 떨기에는 여남은 개의 흰 꽃들이 앙증스레 매달려 있었다.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깜찍하고 여간 귀엽지 않았다.

터키 등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다 보면 온 산이 올리브나무로 뒤덮인 광경을 볼 수 있다. 봄이라면 향기에 젖을 터이고, 가을이라면 새까만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가 휘어져 있을 터이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부드러운 올리브 가지는 반짝거리며 춤을 춘다. 온통 은회색으로 뒤덮인 이런 지중해 해변을 달리면 마음이 절로 부드럽고 온화해지고 낭만적이 된다. 이렇게 올리브 가지들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이유가 있다. 올리브 잎은 앞면은 빛나는 초록색이고 뒷면은 흰 가루가 묻어나는 은회색이어서이다.

지중해 지방 사람들은 가을이면 올리브 열매를 여러 가지 절임음식으로 만든다고 한다. 마치 한국의 김장하기와 것과 같다고나 할까. 독특한 맛이 나는 이 음식들은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음식에는 비타민 등 영양소가 아주 풍부하다고 한다. 올리브 과육으로 짠 올리브유는 영양가가 많을 뿐 아니라 쓰임새가 무척 다양하다. 음료, 비누, 마사지, 장례, 상처 치료에도 활용된다. 고대 로마 시대 전쟁영화에서도 병사들이 전투하다 상처를 입으면 올리브유로 소독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한 항해도 올리브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한다. 식물성유인 올리브유는 항산화 작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요즘 우리나라도 건강식으로 올리브유를 많이 먹기 시작하였다.

올리브는 그리스 문명의 상징이라고도 한다. 찬란한 고대 그리스 문명도 풍부한 올리브유로 밤을 밝힐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원형극장에서의 그리스 연극은 일몰 직전에 시작되었다. 극이 끝난 뒤 심야에는 시, 음악, 와인, 음식을 즐겼는데, 오일램프 덕분에 밤 문화가 가능하였다. 구세주를 의미하는 메시아(Messiah)의 원래 뜻은 '기름 부은 자(Anointed)'라고 한다. '기름 부은 자'만이 구세주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시의 기름은 올리브 오일이었다. 올리브가 '밤을 몰아내는 빛'이니 구세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치열한 다툼이 가득 찬 일몰 전이 속(俗)이라면, 일몰 후에는 기도하고 축복하는 그리스 문화 문명은 성(聖)스런 메시아 탄생으로 보았다. 올리브나무는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서 있는 유일한 나무로 처녀 신(神) 아테나가 그리스인에게 선물로 내렸다고 한다. 올림픽 우승자에게 주는 월계관도 월계수 가지 아니고, 사실은 올리브 가지이니 올리브 관이라 해야 옳다.

성경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세 나무가 있는데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다. 그중에서 동양에서는 올리브나무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다. 한글 성경에서 올리브나무를 감람(橄欖)나무라고 하는 데,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가 아니다. 성경이 중국에서 처음 번역될 때 올리브나무를 비슷한 모양인 중국 원산의 감람나무로 오역한 때문이라 한다. 구약성경에서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물고 온 싱싱한 올리브 가지로 비가 그친 것을 알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예루살렘에는 올리브산이 있다. 예수께서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거쳐 가셨던 곳이었으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 피땀이 흐를 정도로 고뇌의 시간을 보내신 곳이었고, 로마인들에게 체포되신 곳이기도 했다. 또한, 올리브 산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곳으로도 기록되어 있다(사도 1:12). 이 때문에 올리브 산은 예수께서 마지막 때가 이르면 재림하실 곳으로 여겨져 왔다. 당시 올리브나무는 귀하여 함부로 벨 수 없었고, 올리브 목재는 무늬가 아름답고 내구성이 뛰어나 궁중이나 권력자들만 쓸 수 있었다.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서 올리브나무를 키우고 있지만, 자연 상태로는 자라지 않아 무척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최근에 우리 자생 올리브나무를 찾아내서 무척 기쁘다. 바로 한국 등 동북아가 원산인 쥐똥나무다. 나는 식물학자는 아니지만, 쥐똥나무는 아열대 원산인 올리브나무가 북쪽으로 자생지를 넓히는 과정에서 추운 환경에 적응한 모습이라고 추측해본다. 가을로 접어들면 근교 공원 울타리에 까맣게 익은 열매를 단 관목 울타리를 볼 수 있다. 공해가 심한 도심에도 잘 자라는 이 울타리가 바로 쥐똥나무 울타리다. 낙엽이 져도 빽빽하게 자란 작은 나뭇가지들이 울타리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더구나 진주처럼 반짝거리는 콩알만 한 열매까지 다복이 달려 있어 가을이 결실의 계절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쥐똥나무 열매는 남쪽으로 갈수록 더 굵어진다. 제주도에선 거의 콩알 세 배 이상으로까지 자라서, 지중해의 올리브 열매와 모양과 크기가 흡사해진다. 쥐똥나무 잎도 북쪽에서는 겨울이면 완전히 낙엽이 지지만, 남쪽에서는 겨울이 와도 잎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반쯤 상록상태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올리브나무가 상록수인 것처럼 쥐똥나무에도 상록수의 성질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한다. 쥐똥나무 잎이 올리브 잎보다 작고 얇기는 하지만, 앞면은 반짝거리는 녹색이고 뒷면이 은회색인 점은 올리브 잎과 같다. 식물들이 고온다습한 남쪽 지역으로 가면 잎이 두꺼워지고, 북쪽으로 가면 잎이 작고 얇아지며 낙엽이 지게 되는 식물 생태학 원칙을 쥐똥나무도 보여주고 있다.

오늘도 산책하다가 쥐똥나무 울타리에서 새까만 열매를 따다 손으로 문질러본다. 과육 안에 딱딱하고 자그만 씨가 있다. 맛은 쓰지만 과일향이 난다. 쥐똥나무는 관목이라 가만히 두어도 크게 자리지 않아 울타리로 쓰인다. 개나리처럼 잎이 피기 전에 꽃이 피지 않고 무성한 잎 속에 숨어서 꽃을 피운다. 그러니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나무라 하겠다. 노자老子는 ‘곧으려 하거든 몸을 낮추어라. 스스로는 드러내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그 존재가 밝게 나타난다. 공을 이루고도 오히려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 이름이 오래 기억된다’고 하였다. 그러려면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 있는 자이지만, 자기를 아는 사람이 더욱 명철한 자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자이지만 자기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더욱 강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공자도 ‘남이 날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아야 군자다(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 했다.

쥐똥나무와 올리브나무는 같은 물푸레나뭇과이다. 이 과에 속하는 나무로는 라일락, 수수꽃다리, 이팝나무, 개회나무, 은목서, 금목서, 정향나무와 같은 진한 향이 나는 나무가 많다. 이름도 모두 아름답고 개성이 있는데 개나리도 여기에 속한다. 재스민도 같은 과이니 쥐똥나무가 재스민향이 나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이렇게 향기롭고 유용한 나무를 왜 하필이면 쥐똥나무라 이름 지었을까? 어찌 사람들이 무척 싫어하는 동물인 쥐의 배설물을 이름으로 부른단 말인가. 정말 너무하다. 잘난 체하려 키로 발돋움하지 않고 낮은 곳에서 아름답게만 사는 이 나무에게 왜 한국에서만 이런 혐오스런 이름을 붙였을까?

쥐똥나무를 하루속히 어울리는 이름으로 개명했으면 좋겠다. ‘작은 수수꽃다리’란 뜻에서 <앙증꽃다리>라 하면 어떨까. ‘앙증맞다’란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깜찍하고 귀엽다는 뜻이다. ‘꽃다리’란 말을 붙인 것은 크고 화려한 수수꽃다리의 꽃떨기가 크지만 앙증꽃다리와 모양이 무척 닮아서다. 육종학자들도 이 앙증꽃다리를 올리브나무처럼 개량하여 더 유용한 나무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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