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탱자나무에 걸린 고전

  • 입력 2020.03.30 09:00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엠디저널] 녹음이 우거져 낮인데도 솔부엉이는 “부헝!”하고, 소쩍새는 ‘솥이 적다’고 울어댄다. 김상용 시인은 ‘새소리는 공으로 들으야오’라 했지만, 도심을 떠나 산 밑으로 이사 와서 어릴 적 듣던 새소리를 듣는 일은, 결코 공짜가 아니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하다. 재 너머 ‘못골 한옥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파란 꿩 알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아직 덜 익었어도 욕심이 나지만 따기는 쉽지 않다. 잎 뒤에 숨은 파란 가시들이 빼곡히 지키고 있어서다. 탱자나무를 보자 어릴 적 낙동강 변에 길게 늘어서 있던 탱자나무 울타리가 그립다.

초등학교 시절 가을이면 친구들이 우리 집에는 없는 탱자를 학교에 가져왔다. 맛이 시어서 먹을 수는 없었지만 말랑하고 향기로운 탱자가 무척 갖고 싶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나는 눈을 가린 장닭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 들고 조부님의 누이인 왕고모님 댁으로 향했다. 장닭이 버둥거렸지만 내 들뜬 마음은 옹골차게 장닭을 제압했다. 고무신에 밟히는 모래알들이 사박거리는 신작로 길을 따라 장구처럼 생긴 ‘장구배미’ 거쳐, 역행으로 밭을 가라야 하는 ‘치갈이 밭’을 지났다. 가오리처럼 넓은 ‘가올배미’ 논머리에서 조부님은 논물을 보셨다. 물괴로 논의 물 높이를 조절하시고, ‘파래배미’와 연결된 통나무 보에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씻으셨다. 이 ‘파래배미’ 우물인 파래에는 붕어와 미꾸라지가 많았는데, 어느 해 가을에는 팔뚝만 한 뱀장어를 잡은 적도 있었다.

신작로를 따라 계속 가다가 우측에 건너 산기슭에 엄청나게 큰 바위 두 개가 겹쳐져 있었다. 어두컴컴한 바위틈을 관 같은 널빤지가 가리고 있었고, 그리로 여우들이 드나들어 ‘여수바우’라 불렀다. ‘여수바우’ 아래 작은 폭포에는 가재들이 아주 많았지만 나는 여우에 홀릴까 겁이 나 평소에는 좀처럼 갈 수 없었다. ‘여수바우’ 위는 개울가에 닭 머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 그곳을 ‘달구바우’라 불렀다. 여수바우 앞에 가로로 기다란 논과 신작로가 닿은 곳에 큰 바위인 선돌이 있었다. 가을이면 이 돌 위에 올라서서 왕골로 만든 팔대를 쳐서 새를 쫓곤 했다.

한 십 리를 갔을 무렵 어디선가 향긋한 탱자 내음이 바람에 실려 왔다. 낙동강을 따라 펼쳐진 사과과수원 울타리에 노란 탱자들이 소복이 달려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귀신도 못 뚫는다지만, 향긋한 탱자 냄새는 봇물처럼 빠져 나와 강바람을 타고 포구에 흩날렸다. 이 마을 이름은 주진리(舟津里)이니 순우리말로 ‘배나들’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배가 드나드는 곳’이다. 다시 살려 쓰고 싶도록 무척 아름다운 순우리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낙동강 변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탐나는 탱자를 따고 싶었으나 딸 수가 없었다. 사납게 지키고 있는 푸른 가시 때문이었다. 조부님을 졸라 왕고모님 과수원울타리에서 보자기 가득 탱자를 땄다. 탱자나무는 가시가 빽빽한 나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성벽(城壁) 앞에 해자(垓字) 대신에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현재 충남 서산 해미읍성 앞에도 탱자나무가 있고, 고려 고종 때 몽고를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며 쌓은 성 앞에도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강화도는 탱자나무 북한계라고 한다.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이건창(李建昌) 선생 생가 앞 오래된 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강남의 귤나무를 북쪽에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뜻’으로 남귤북지(南橘北枳)란 말이 있다. 사람은 그가 처한 환경에 따라 착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심성을 갖기도 한다는 뜻이다. 맹모삼천(孟母三遷)도 이런 이치 때문이다. 남귤북지 고사(古事)의 주인공은 당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제(祭)나라 재상 안영(晏嬰)이었다. 강대국이었던 초(楚)나라 왕은 약소국 재상인 안영을 골탕 먹임으로써 초나라의 위세를 과시하고 싶었다. 안영을 초나라로 초대했을 때, 마침 한 죄인이 끌려 들어왔다. 이에 초나라 왕이 ‘그 죄인이 어느 나라 출신인지’를 묻자, 신하들이 ‘제나라 출신인데 도둑질을 해서 잡혀 왔다’고 답했다. 이에 각본에 있는 대로 초나라 왕은 안영에게 “제나라 사람들은 본래 도둑질을 잘 하오?”하고 물었다. 이에 안영이 “강남에서 자라는 귤나무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고 합니다. 저 사람도 제나라에 있을 때는 성실했는데 이곳에 와서 도둑이 되고 말았군요.”하고 답했다. 초나라에서 도둑질을 배웠다는 뜻이니, 코가 납작해진 것은 초나라 왕은 안영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안영은 공자보다 한 세대 앞선 사람이지만 활동 시기가 20년 정도 겹친다고 한다. ≪논어≫ <공야장>에서 공자는 “안평중(平仲, 안영의 字)은 사람과 더불어 사귀기를 좋아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라 하며 안영을 높이 평가하였다. ≪맹자≫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에서 맹자의 제자 중 제나라 출신이었던 공손추가 맹자에게 당돌한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공손추는 맹자에게 “만약 선생님이 제나라 재상에 오른다면 관중이나 안영처럼 정치를 잘 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기분이 상한 맹자는 “너 정말 어쩔 수 없는 제나라 사람이구나”하며 제나라에서 정치를 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이처럼 제나라 사람들은 관중과 안영이 제나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칭송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오늘날 안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다.”고까지 하며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제(祭)나라에서 3대(靈公, 莊公, 景公)에 걸쳐 수십 년간 재상으로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안연은 140cm가 채 안 되는 작은 키에다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안자춘추≫에는 제나라 임금이 공자를 등용하려 하자, 안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공자는 독선적이고, 정치를 백성과 친밀하게 하지 못하며, 천명만 앞세워 게으르고, 장례비용을 많이 쓰고 상례를 너무 오래 끌며, 위선적이라 했다. 이에 공자도 안연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되었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왜 안연을 만나지 않느냐고 하니, 세 임금을 섬겼으니 세 마음이라 했다한다. 이에 안연은 “내 마음이 세 개가 아니고, 세 임금의 백성을 위한 마음이 하나였다.”라 답했다. 그 외에도 두 사람 간에 얽힌 사연들이 많다.

탱자나무가 부산 가덕도 산꼭대기에도 자라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도 중국과 더불어 탱자나무 원산지로 보고 있다. 탱자와 귤은 같은 운향과이지만 종이 서로 다르다. 탱자는 강남에 심어도 탱자이고, 귤은 강북에 심으면 얼어 죽을지언정 탱자가 맺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의 양자강과 황하 사이를 흐르는 회하(淮河)를 중심으로 남귤북지라는 말은 식물생태학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탱자는 장수(長壽)에 꼭 필요한 항산화 물질인 비타민C가 귤보다 몇 배나 풍부하다. 귤보다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귤나무 접목대목으로 널리 쓰인다. 육종학자들이 탱자의 신맛만 개선한다면 향이나 영양가 면에서 나무랄 곳이 없는 과일이다.

약관 15세에 대과에 급제한 이건창 선생은 구한말 민족의 정신적 지주의 한 분이셨다. 너무 일찍 등과하여 4년을 기다렸다가 출사했다한다. 그는 당시 대세인 주자학 대신에 실사구시와 지행합일을 내세우는 양명학의 강화학파의 마지막 대학자였다. 명문 집이고 명문장가에다 강직한 성품을 지녀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살이는 순탄치 못했다. 부정한 관리를 처단하는데 주저함이 없어 역풍으로 귀양 가기가 일수였던 그의 생은 아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 崧陽道中(숭양도중: 숭양 가는 길에/이건창 문학비에서) -

崧陽六載五經過(숭양육재오경과: 개성을 육 년 사이에 다섯 번 지났지만)

不見扶山與彩霞(불견부산여채하: 부소산과 채하동도 들르지 못했네)

細數一生遊宦事(세수일생유환사: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 동안 벼슬살이에서)

會心惼小役形多(회심편소역형다: 마음에 맞는 일보다는 몸만 고달팠네)

나도 고달픔에서 벗어나 고향 여수바우 논에 집 짓고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드리우고 싶다.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