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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蔘)심는 귀농스토리

  • 입력 2020.05.18 09:01
  • 수정 2020.06.09 10:40
  • 기자명 남민수(김앤남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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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대로 흘러왔다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치열하게 닦아온 저의 길이었습니다.

[엠디저널] 아차산 인근에 10년 넘게 살면서도 산 입구 근처에도 가본 적 없던 제가, 산을 타며 산양삼을 심고 캐는 농업법인 대표가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산촌과 농촌은 서울과는 과연 사뭇 다릅니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맺는 것이 신기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부동산 분양, 공인중개사사무소, 중고차 딜러 심지어는 붕어빵 장사까지 어린 시절, 젊은 시절 때부터 이른 바 ‘안 해본 것 없이’ 일터를 전전해왔습니다. ‘광고매체’. 직접 판매가 아닌, 광고매체를 이용하는 광고업이 내 인생 최고 직업이겠다는 생각으로 20대 끝자락 나이에 광고대행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업계 언저리에서 본 광고업과 실제 광고회사의 일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 선택한 일이 언론대행사. 한 가지 매체에서 최고가 되자는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지금 저는 산양삼 사업을 하는 회사의 대표로서 이른 바 ‘귀농’했습니다.. 저는 30대 남민수입니다. 이제부터 하나 둘 씩 저의 귀농 스토리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귀농, 귀촌, 귀산촌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저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엊그제, 그러니까 4월에 산양삼 씨를 뿌렸습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때도 4월이었는데

 처음 산양삼을 접하게 된 계기는 산양삼 사업을 하는 회사를 만났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저는 산양삼 사업말고 다른 걸 하시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었습니다. 솔직히 하찮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는 산양삼을 비롯한 농촌 비즈니스의 구조에 대한 관심과 매출이었습니다. 적당히 오픈마켓 등에 올려놓고, 주문이 들어오면 하루 2~3시간 포장해서 보내고 ‘이것만 해도 매출이 나온다고?’ 치열한 무한경쟁에 비해 무주공산처럼 보였습니다. 서울에서의 다른 일과 주변 환경을 모두 정리하고 거주지부터 원주로 옮겨버렸습니다. 일터를 제대로 정하기도 전에 거주지부터 옮긴 것이었습니다. 배수의진. 산양삼 공부에 매진했습니다.산양삼 소매부터 시작했습니다. 가게도 유통망도 뭐도 없고 온라인상으로 조금씩 조금씩 판매해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매출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리고 곧 이 일이 좋다고 느껴졌습니다. 계기는 식상하게도 돈 때문은 아니고, 고객분의 전화 때문이었습니다. 사연이 참으로 많습니다. 상품이 상품이다보니 유난히 전화가 많이 옵니다. 대장암 수술 후 1년 간 기력이 쇠했다가, ‘저의 산양삼’을 드시고 기력을 회복하여 지금은 아파트 경비일까지 하게 되셨다는 전화도 있었습니다. ‘제가 뭐라고...’ 감사 전화, 주변에 소개했다는 내용 참으로 많습니다. 기쁨보다는 놀람이 더욱 많았고, 서울에서 영업을 하면서 고맙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안 났습니다.)

신이 주신 내 길인가보다.

 기존의 천편일률과 달리 B급삼, 못난이 산양삼 등 키워드를 만들고 광고기법을 적용하니 새로운 시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몸에도 변화가 와서, 학창시절부터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던 지방간. 지금은 간수치, 혈압수치가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작금의 농촌 생태계는 참으로 정직합니다. 무한경쟁의 도시 사무직과 달리 임-농 작물은 노력한 만큼 결실을 맺습니다. 그리고 저는 귀농해서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농촌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루틴하게 하던 것만 하면 도태됩니다. 다 같이 도태된 상태인 농촌이 많습니다. 1차 산업 구조적 한계일 것입니다. 횡성 1곳, 가평 3곳, 원주에 본사.수 만평씩 넓혀가고 있습니다. 농촌의 한계를 범사회적으로 극복해나가고 싶습니다. 저의 성공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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