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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시험을 탄생시킨 ‘눈의 황반변성’에드가 드가 (Edgar Degas1834-1917)
  •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 승인 2020.06.1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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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1863) 리스본, 키로우스테 굴벤키안 미술관

[엠디저널] 프랑스의 화가 에드가 드가는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루이르그랑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중단하고 1855년에는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졸업 후에는 화가 앵그르의 제자인 루이 라모드의 화실에 들어가 사사 받았다. 그래서인지 데생(dessin)을 중요시하던 앵그르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드가는 당시 아카데미가 주장하였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받아들여 역사화를 그리려 했으나 이를 포기하였으며, 열을 올리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과 같이 실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사양하고 파리의 분주한 도시생활 속에서 자신의 주제를 찾으려 하였다.

하루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 ‘마리가리타의 왕녀’ 앞에서 넋을 잃고 보고 있다가 자기와 같이 그 그림에 감동되어 심취되고 있는 마네(Edouard Mannet 1832-1883)를 만나 두 사람은 그림에 대한 심각한 토론을 벌이다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와는 평생을 통한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드가는 주로 실내에서 모델들이 익숙한 동작에 몰두해 있는 것을 주제 삼아 그리기 시작 했다. 즉 음악가들과 무대에 서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런 화제가 그의 평생을 사로잡는 화제가 되었는데 그것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1870~71년에는 보불전쟁에 참전하여 포병대에서 복무하였는데 총을 조준하다가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아 결국은 후방부대로 배치되었다. 이로서 비로소 그는 자기의 눈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군이 이동하면서 만난 야심만만한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그리기 시작했고, 무대와 오케스트라의 사람들에 대한 습작도 계속했다. 이때부터 그는 인물의 배치를 바꾸고 사진을 찍는 방식으로 야외와 실내의 순간적인 광경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실내화 특히 순간적인 동작에 심취하여 그리게 된 것에도 상당한 이유가 있다. 그가 1872년 10월 미국을 방문하여 5개월 동안 루이지아나의 친척집에 머문 적이 있는데 드가는 그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즐길 수 없었다. 친척들이 왜 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그리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빛이 너무 강해 눈을 뜰 수가 없어 아름답다는 강변의 경치를 잘 볼 수가 없어요.”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 또 알게 된 사실은 사촌 여동생(Estelle Mousson Degas)이 25세 때부터 좌측 눈의 시력이 떨어져 잘 볼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32세 때 완전히 실명(失明) 되었다. 이로서 드가의 가계에는 유전성인 눈의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가는 당시 유명한 안과의사이라면 모조리 방문하였으나 녹내장(綠內障)이라는 진단으로 안약을 처방하였으나 그의 시력은 점점 떨어져 그림을 그리는데 지장을 주었다.

드가의 시력장애에 대해서는 안과의사들 간에도 의견이 구구하다. 영국의 안과의사 Trever Roper(1970)는 망막색소변성(網膜色素變性) 아니면 망막 결핵이 의심된다고 하였고, 프랑스의 안과의사 Lanthony는 홍채(紅彩)의 만성염증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또 미시간 대학의 안과교수 Revin은 증상이 만성적으로 경과되고 당시 안과의사 들의 진료부를 보아도 드가가 염증을 호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망막이나 홍채의 이상이라기보다는 황반변성(macular degeneration)의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황반이란 망막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망막의 다른 부위 보다 시(視)기능이 좋고 예민해서 대상을 주시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시력검사에서는 이 황반의 중심부인 중심와(窩)의 시력이 측정되는 셈이다. 황반변성은 만성으로 진행되는 위축형과 신생혈관에 의해 비교적 급성으로 진행되는 참출형(慘出型)의 두 가지가 있는데 드가는 전자에 속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드가가 이러한 시력장애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그의 작품과의 관련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드가는 다른 인상파 화가와는 달리 실외의 풍경화를 그린 것은 거의 없으며 음악이나 발레의 무대나 연습장 또는 카페에서의 순간 동작을 그리기에 집착하였다.

그림의 구도에 있어서도 그의 작품은 근경(近景)을 강조하고 원경(遠景)은 대담하게 단순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드가의 시야의 중심부에 흑점(黑點)이 있어 대상을 주시 할 수가 없어 그림의 주제를 중심에 놓지 않고 좌우상하의 주변에 놓고 있다. 이제 그러한 그림을 살펴보기로 한다.

드가 작: ‘오페라 하우스의 오케스트라’ (1870) 파리, 오르세 미술관

드가의 작품 ‘오페라 하우스의 오케스트라’(1870)는 그의 비교적 초기 작품에 해당된다. 그림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하는 모습으로 채워져 있으나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발레리나들의 모습은 매우 희미하게 처리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림의 근경은 강조하여 자세하게 표현하였으나 원경은 대담하게 단순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드가 작: ‘발레 리허설’ (1874) 파리, 오르세 미술관

그의 작품 ‘발레 리허설’(1874)을 보면 물론 댄스의 연습 관경이기 때문에 인물배치가 그림의 주변에 놓였다고 변명할 수 있겠으나 그림의 중심에는 마루만 보이는 공간이 너무 넓게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Revin 교수가 지적한바와 같이 드가의 눈의 장애는 황반 변성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드가 작: ‘발레 시험’ (1874)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의 작품 ‘발레 시험’(1874)도 역시 인물들의 배치를 주변에 놓고 있으며 중심의 공간은 앞의 그림보다는 다서 덜한 것 같은데 그것은 파리의 유명했던 발레 지도자 쥬르 베로의 은태를 앞둔 그림이기 때문의 무희들보다도 그를 부각시키기 위한 배려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베로의 위치도 중심이 아니라 우측 가장자리에 서 있다. 이렇게 드가가 황반 변성이어서 그림의 주변에 역점을 두고 중심부는 공간으로 하고 있는 그림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은 세월이 흐를 수 록 더욱 두드러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드가 작: ‘발레 전’ (1886) 워싱턴, 국립미술관

그의 작품 ‘발레 전(前)’(1886)이라는 그림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어 멀리에서 연습하는 무희들은 희미하고 가까이에서 준비하는 무희는 뚜렷이 표현되었으나 수가 적고 중심에는 마루 공간이 너무 넓다.

그가 발레장면 그리기에 전념한 것도 무희들의 연습용 손잡이와 거울은 그 방의 가장자리인 벽에 붙어있기 때문에 연습하는 무희를 그리는 것은 그에게는 불편 없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발레 그림을 그려 일명 발레 화가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은 그의 눈의 장애가 그를 유명한 발레 화가로 탄생시킨 것이다.

드가의 눈의 장애는 점점 심해져 유화를 그릴 때의 물감과 기름 그리고 다른 물감과의 배합이 점점 힘들어 지자 그는 유화를 포기하고 파스텔화에 전념하여 그 나름대로의 휘발성 기름과 파스텔을 섞어서 사용하는 독창성을 발휘하여 많은 파스텔화의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드가 작: ‘위대한 아라베스크’ (1892-96) 파리, 오르세 미술관

1880년부터 드가는 이따금 조각도 했으며, 무희들, 목욕하는 여인 등의 걸작을 남겼다. 말년에 시력을 잃어 한쪽 눈은 완전히 실명했고 나머지 눈도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 즉 드가는 시력장애 때문에 유화와 판화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파스텔화와 조각을 통해 그의 대담성과 환상적인 그의 예술성은 다시 개화된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 73세가 된 드가는 폐기종으로 휴양지로 전지 치료를 떠나게 되었으며 창작활동은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간의 요양을 하다가 1917년 9월 27일 당년 83세에 서거하게 되었다.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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