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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의 갈등과 고뇌 희생된 이들을 기리며
  •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 승인 2020.06.22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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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현충일과 6·25가 있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이다. 우리가 이렇게 일상에서 문화예술의 산물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를 지켜낸 이들의 희생 덕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라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게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떠오르는 음악으로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교향곡 제7번 Op. 60 <레닌그라드>가 있다. 한때 소련의 작곡가라는 이유로 연주가 금지된 적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연주단체의 프로그램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연주된 금지곡

이 곡의 국내 연주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7년 세계적인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과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연주 당시, 프로그램에 포함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 문제가 되었다. 번스타인은 냉전과 함께 매카시즘 광풍의 시기였던 1950년대 초 인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음악인이었다. 당시 한국 주최 측은 연주에서 소련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제외하도록 요청했는데, 번스타인이 이를 묵살하고 예정대로 연주를 진행했다. 이때 처음으로 이 곡이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연주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예술을 당의 선전 도구로 이용했던 스탈린 정권의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책을 받아들이면서 당국이 원하는 곡들을 작곡하였고, 스탈린 사후에야 비로소 자유롭게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의 혹독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당의 요구에 맞는 작품을 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속에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뎌낸 한 예술가의 진솔한 고백, 그리고 전쟁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깊은 슬픔이 녹아 있다. 이처럼 힘든 시기에 음악 활동을 이어 왔던 중 교향곡 제 7번 <레닌그라드>는 특히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경고, 그리고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있는 서방 세계인들마저 감동하게 했다.

이 곡의 유럽 초연은 1942년 영국에서 헨리 우드 경(Sir Henry J. Wood)의 지휘에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이는 미디어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는데, 쇼스타코비치의 레퍼토리 중 연주 시간이 가장 긴 곡(약 75분, 번스타인 버전 85분)으로도 알려진 만큼 교향곡의 연주 시간이 너무 길어서 전쟁 중에도 지켜진 9시 뉴스 시간이 바뀔 정도였다고 한다.

미국 타임 지 커버를 장식한 쇼스타코비치 이미지출처 Time Magazine

전쟁의 폐허 속 희망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

그가 남긴 15곡의 교향곡 가운데 ‘전쟁 교향곡’이라고도 불리는 교향곡 제7번은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의 포위로 위기에 처했을 때 작곡되었다. 독일군의 진격이 계속되는 중에도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의 작업에 몰두했다. 과거 ‘레닌그라드’라는 도시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 아름다운 도시의 시민들이 공포정치와 전쟁으로 희생당하는 모습을 본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에서 그 참상을 전하는 동시에 폐허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했다.

이 곡은 고전적 형태의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는 작곡 초기에 1악장은 ‘전쟁’, 2악장은 ‘회상’, 3악장은 ‘조국의 광야’, 4악장은 ‘승리’로 이름 붙였다. 하지만 부제가 곡 해석에 선입견을 줄 수 있다는 우려로 추후 삭제되었다. 마지막 악장 ‘승리(Victory)’에서는 팀파니의 조용한 울림으로 시작하여 모스 부호의 ‘V’를 나타내는 ‘다다다단-‘으로 승리를 암시하는 듯하다가 이후 승리의 상징인 금관악기의 화려한 팡파르(fanfare)와 모든 악기들의 힘찬 연주로 휘몰아치며 4대의 팀파니의 강렬한 리듬으로 이 악장의 중심 주제를 연주하면서 찬란한 피날레로 마무리된다.

국내 첫 연주를 이끈 번스타인과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담은 앨범 커버 이미지 출처 YES24

이 교향곡은 비참한 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담은 그 증거이며, 음표로 그려진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대서사시이자,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슬픈 레퀴엠(Requiem, 진혼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평가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가 그의 저서인 <증언: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에 따르면, 이 곡은 레닌그라드 침공 이전부터 계획되었으며 전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성경의 시편 94편 다윗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다음은 회고록의 발췌문이다.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닌 그 도시를 애도한 곡이다. [...] 스탈린의 포악한 정치에 희생된 수백만 명의 비운을 애도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 대부분 나의 교향곡은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묘비이다. 어느 곳에 그들의 묘비를 세우겠는가? 단지 음악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호국보훈의 달 6월, 우리가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아야 할 시간이다. 보훈이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그에 보답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희생과 공헌이 헛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좋은 나라로 가꿔나가야 한다. 전쟁의 고통이 남긴 것들을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안락한 삶에 감사하며, 작곡가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논쟁을 떠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보고 겪고 느낀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예술가였던 그의 노력이 만든 그 작품을 듣고 위로를 받으며 어느 때보다 평화를 향한 열망이 강해지는 이 시대에, 곡에 담긴 메시지를 되새겨볼 시간이다.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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