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불교는 매우 정밀한 정신치료

  • 입력 2020.06.25 08:24
  • 기자명 전현수(송파 전현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igmund_Freud_1926
Sigmund_Freud_1926

[엠디저널] 프로이트는《나의 이력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나는 나의 필생의 연구가 가져온 잡동사니를 되돌아보며, 내가 여러 가지를 시작하고 많은 자극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차 이들로부터 무엇인가가 나와야 할 것이다. 나 자신 그것이 대단한 것이 될지 되지 않을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우리 인식의 중요한 진보를 위한 길을 열어놓았으리라는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융은《정신요법의 기본 문제》(윤 기본 저작집 1권)<정신치료의 목표>에서 이렇게 말을 하지요. “내가 그들(프로이트와 아들러)과 다른 나의 견해를 그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나 자신을 하나의 다른 성향의 단순한 대표자로 느끼기 때문에····· 응용심리학 안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상반되는 다양한 의견들의 유효성을 시인해야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학의 가장 고귀한 대상인 인간의 심혼에 대해 어떤 근본적인 것을 알기에는 아직 요원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서로 일치되지 않는 다소 그럴듯한 의견들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언급은 프로이트와 융의 겸손한 태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들이 자신의 견해를 완전히 확신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들과 달리 부처님은 당신이 발견한 것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말하지 않습니다.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해서 확신이 설 때 세상에 가르침을 펼치며, 그에 대한 확신을 내비칩니다. 한 예로,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후 최초 설법에서 사성제(‘고통이 있고, 고통의 원인이 있고, 고통을 없앨 수 있고, 그 방법이 있다’는 불교의 핵심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지 못하였다면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정신치료의 창시자를 굳이 따지자면 부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 각자에 맞춰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제시했고, 그 가르침을 실천한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고통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니까야 속에서 이런 장면들을 거듭 만나면서 저는 불교가 어느 정신치료 못지않은 훌륭한 정신치료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불교에는 인간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습니다. 머릿속 사유를 통한 이해가 아니라 관찰을 통해서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관찰을 통한 인간 이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부처님이 관찰을 통해 알았다면 저도 여러분도 관찰을 통해 똑같은 것을 알고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이렇게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세상을 정확히 알고 그에 근거하여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입니다.

불교에서 관찰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 덩어리로써 관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정을 통해 지혜의 눈을 계발하여 궁극적 물질과 정신을 보는 것입니다. 덩어리로써 본다는 것은 손이면 손, 눈이면 눈, 발이면 발, 분노면 분노, 기쁨이면 기쁨, 움직임이면 움직임이라고 그저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해도 실제를 많이 알 수 있고, 어지간한 정신적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아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덩어리로써 보면 나를 고정된 실체로 보는 유신견(有身見)을 완전히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손을 손으로 볼 때 손이 변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고 손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선정을 통해 지혜의 눈이 열리면 유신견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손의 경우를 예를 들면, 손이 궁극적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보이고, 궁극적 물질이 순간순간 이러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면 손이 순간순간 변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변하는 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으니까 손을 내 것이라고 볼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선정을 닦아서 지혜의 눈이 열리면 일종의 현미경을 하나 갖게 됩니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포와 원자를 현미경으로는 볼 수 있듯이, 지혜의 눈이라는 현미경으로 우리는 궁극적 물질과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현미경은 물질만 볼 수 있지만 지혜의 눈이라는 현미경은 정신까지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정신인식과정이 어떠한지를 매우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는 매우 정밀한 심리학 또는 정신치료가 됩니다.

둘째로, 불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유익한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제시하는 길을 따르면 누구나 정신적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신적 문제가 생기는 것은 스스로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스스로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손해가 되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잘못 알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교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걸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과거 생에 보살로 살았는데, 그 보살들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 합니다.

《자따까》라는 경전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한 예를 보면, 보살이 큰 부잣집에 태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이 죽었어요. 그래서 온 가족이 슬피 우는데 보살은 혼자 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살을 비난했습니다. 형이 죽어 집안의 재산을 독차지하게 되었으니 기뻐서 울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보살이 이렇게 답을 합니다. “내가 울어서 형에게 도움이 되고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운다. 그렇지만 우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손해만 된다면 나는 절대로 울지 않는다.”

그리고 부처님 제가 가운데 지혜 제일이라는 사리불이 있습니다. 그 사리불도 손해되는 일을 절대 안하는 전형입니다. 당시에 사리불은 절대로 화를 안 낸다고 알려져 있었어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사리불이 화내는 걸 보겠다고, 걸어가는 사리불 뒤에 가서 등짝을 후려쳤습니다. 그런데 사리불은 아무런 동요 없이 그냥 그대로 걸어갔습니다. 제 생각엔 사리불이 ‘그럴 만한 일이 있겠지.’하고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깊이의 차이는 있지만 부처님이 경험한 것을 똑같이 경험합니다. 니까야 전체가 그것의 증명이라고 보면 됩니다. 부처님 본인이 철저히 증명하고, 제자들이 증명하고, 제자 상호간에 또 증명합니다. 그중 <장로게>와 <장로니게>를 보면 많은 수행자가 부처님과 같은 경험을 했다는 증언이 나옵니다. <장로게>는 출가한 지 오래되고 인품이 훌륭한 비구가 깨달은 내용이고<장로니게>는 출가한 지 오래되고 인품이 훌륭한 비구니(여성승려)가 깨달은 내용인데, 거기에 ‘지난밤에 삼명을 깨쳤다’고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삼명이란 자신의 과거 생을 보는 숙명통, 업에 따라 태어나는 것을 보는 천안통, 번뇌가 모두 없어지는 누진통을 말합니다. <장로게>와<장노니게>에는 300명이 넘는 수행자가 나오는데 그중 80명이 자신의 과거생을 모두 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거듭 말씀드렸듯이 불교는 관찰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뇌과학으로 이미 증명된 것들도 있고요. 아마 윤회가 맨 마지막에 증명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 만큼 과학이 발달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불교의 인간 이해는 과거 어떤 정신치료 학파의 인간 이해보다도 더 검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