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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를 탄생시킨 ‘정신발작’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 입력 2020.07.21 12:34
  • 기자명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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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작: ‘담배 피우는 자화상’(1895) 오슬러, 국립 미술관
뭉크 작: ‘담배 피우는 자화상’(1895) 오슬러, 국립 미술관

[엠디저널]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부인인 레우라 가 죽기 전까지는 유머도 풍부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1868년 겨울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슬픔에 빠져들었으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그의 아버지는 점점 더 광적인 신자가 되었고, 심한 이상 성격 자가 되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뭉크에게 죽음과 지옥에 대한 절망적인 공포를 안겨주었다. 즉 뭉크는 아버지가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이 죽음으로 가득 찼다는 것에서 의학을 불신하고 미술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 자신도 병약하였으며 그와 같은 환경과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오슬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1881∼1884), 급진적인 예술인그룹의 영향을 받아 삶과 죽음에 대한 주제로 그의 작품은 일관하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을 바탕으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구체화하여 상징적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출하고자 했다. 특히 생애 전체를 통해 볼 때 뭉크는 훌륭한 초상화가였으며, 그가 즐겨 다룬 것은 자기 자신으로써 일생의 대 시리즈가 되는 자화상을 남겼다.

뭉크 작: ‘절규’ (1893) 오슬러, 국립 미술관
뭉크 작: ‘절규’ (1893) 오슬러, 국립 미술관

그의 자화상 중에서 거친 필세에 의한 자신의 얼굴을 표현한 그림으로는 ‘담배피우는 자화상’(1895)과 심리적인 자화상인 ‘절규’(1893) 그리고 ‘고뇌하는 자화상’(1926) 등은 그의 병적을 잘 나타내는 자화상이며 또 그의 병 때문에 탄생된 소위 심리적 자화상인 ‘절규’는 세계적인 명화가 되었으며 인간의 고뇌나 공포의 상징으로 그의 그림의 괴물과 같은 절규하는 얼굴이 사용되고 있다. 그가 담배피우는 자화상을 그리고 나서 남긴 글 가운데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병이요, 도취이다. 그 병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병이요, 그 도취는 내게 필요한 도취이다.”라고 하였다. 즉 그는 정신질환을 앓으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그것이 병과의 투쟁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 중에는 인간의 고뇌나 공포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 많은데, 그의 작품 ‘절규’라는 그림은 다리 난간에 홀로 서서 양쪽 귀에 손을 대고 괴로워 소리 지르는 마치 해골 같은 인간은 필사적으로 무엇인가 공포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듯 하는 그림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본인을 마치 지옥의 유황불에서 막 건져 올린 듯 흐물흐물하고, 그 눈동자는 총기를 잃고 퀭하지만 그림 속에서 금방이라도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뭉크의 이미지들은 화면에서 현실 공간에서 부유하며 떠다니는 무척추동물을 연상케 한다.

그림 2의 확대: 공포와 고민의 상징이 된 뭉크의 절규 괴물
그림 2의 확대: 공포와 고민의 상징이 된 뭉크의 절규 괴물

이 그림은 화가자신의 체험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그의 일기(1892)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두 친구와 같이 길을 거닐고 있었다. 해가 저물었다.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우뚝 서 버렸다. 죽을 것같이 피곤해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검푸른 도시의 협만에 걸린 타오르는 핏빛 구름을 보았다. 친구는 계속 걸어가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공포에 떨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 무렵 뭉크가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작품의 맨 위에 가늘게 써놓은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거기에는 ‘광인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적혀있다. 즉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 문구를 정말 뭉크가 적어놓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뭉크의 정신장애가 이 그림을 탄생시킨 것만은 확실하다. 즉 그가 1905년에 쓴 글에서는 ‘몇 년 동안 나는 거의 미쳐 있었다. 그때 광인이 무시무시하게 뒤틀린 얼굴을 내밀었다. 여러분도 나의 그림 ‘절규’를 알고 있겠지만, 당시 나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있었으며 내 피 속에까지 자연의 절규가 스며들어 나는 터질 것만 같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듯 그의 정신이상이‘절규’라라는 명화를 탄생 시켰던 것이다. 그는 이 그림과 더불어 남긴 글에서 “나는 숨쉬고, 느끼고, 사랑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라고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정신적인 고독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불안하고 절망적인 현대사회에 대한 절규이며 경고라고 해석된다. 즉 인간은 결코 고독, 공포,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죽음에서 삶을 보듯, 고독과 공포, 불안과 절망을 통해 현실을 보아 터져나는 절규야 말로 오늘날 문명사회라고는 하지만 파괴되는 자연과 문화생활이라는 면목 하에 각박해지고 살벌해져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외침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후에도 뭉크는 끊임없는 정신분열증의 발작과 불안에 시달리던 나머지 그는 코펜하겐의 야콥슨박사의 정신과 병원에 입원하여 3개월 남직한 동한 치료를 받았는데 그 치료는 주로 전기충격요법을 받았다. 전기충격요법이란 전기로 충격을 주면 환자는 마치 간질환자가 발작할 때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떨듯이 심한 총격을 가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죄의식을 몰아낸다는 가설로 이루어지는 보기에도 끔찍스러운 환자에게는 상당한 고통을 주는 치료법이었다.

뭉크 작: ‘야콥슨 박사의 초상’(1908) 오슬러, 뭉크 미술관
뭉크 작: ‘야콥슨 박사의 초상’(1908) 오슬러, 뭉크 미술관

병원에 입원한 그는 정신장애에 대한 치료뿐만이 아니라 알코올 중독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치료도 받았다. 그는 입원 중에 야콥슨 박사에게 감사의 뜻으로 그의 초상화 ‘야콥슨 박사의 초상’(1908)을 그렸는데 그림의 야콥슨 박사는 상당히 거구인 것으로 표현하였다. 물론 북구사람이기에 거구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전기충격을 가하는 야콥슨 박사가 아주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서 커 보이기 때문인 것 같으며, 정장을 하고 서있는 전신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그가 자기 주치의를 우러러 보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야콥슨 박사는 체격도 당당할 뿐만 아니라 그가 취하고 있는 태도 역시 위풍당당하다. 양 손을 허리에 올리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바라보는 눈초리는 매우 엄하면서도 인자하여 환자를 안심시키는 듯이 보인다.

뭉크 작: ‘고뇌하는 자화상’(1926) 오슬러, 뭉크 미술관
뭉크 작: ‘고뇌하는 자화상’(1926) 오슬러, 뭉크 미술관

뭉크는 정신이상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작품 활동은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시력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좌측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기의 시력장애에 고민한 나머지 그린 것이 ‘고뇌하는 자화상’(1926)이다. 화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밑으로 깔고 옷을 입고 있다.

1930년 봄에는 그의 우측 눈의 안구내출혈(眼球內出血)이 야기되어 병원을 찾게 되었다. 당시 그의 주치의는 오슬러 시민병원의 안과과장 Johan Raeder(1889-1956)박사였으며 그의 기록은 아직 남아있다. 그는 뭉크가 눈의 혹사와 과로에 의한 것으로 보고 일절의 창작활동, 집필, 독서 등을 금지 시켰으며 육체적 정신적 안정을 취하게 하였던바 그 후에는 비문증(myodesopsia)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비문증이란 ‘날파리증’이라고도 하며 환자들은 “눈에서 하루살이가 날아다닌다”, “까만 점이 둥둥 떠다닌다” 등을 호소하게 되는데 이것은 눈 속에 있는 초자체(硝子體)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혼탁이 생기거나 이물질이 나타나는 경우 망막에 그림자가 비쳐 눈앞에 무엇인가가 떠다니는 것같이 보이게 된다. 이렇게 눈앞에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문증(飛蚊症)이라고 한다.

뭉크가 살던 19세기말은 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 고민 했던 시대이다. 즉 생명의 신비, 예고 없이 닥치는 죽음, 사랑의 배반의 괴로움 등은 그 시대를 살았던 예민한 젊은이들이 갖고 있던 공통된 고민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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