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디저널] 불교의 인간 이해에 근거해서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담자에게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상황을 탐색하고 서로 논의하여 내담자를 완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내담자는 치료자가 자신과 자신의 문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자신을 수용해준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지 못하고 치료자가 자신을 잘 모른 채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느끼게 되면 치료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충분한 이해와 신뢰가 구축되면, 그 다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 불교적인 접근입니다. 불교적으로 접근할 때 굉장히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디서 조금 듣고 책에서 몇 번 본 것을 가지고 치료 작업에 들어가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치료에 쓸 수 있는 것은 치료자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거듭 검증하여 치료 효과가 있다고 판명된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가능성으로서의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담자에게 “당신은 부처입니다.”라고 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내담자가 왜 자신이 부처인지 설명해달라고 했을 때 검증된 사실을 바탕으로 답할 수 없다면 치료 작업을 지속하는 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불교정신치료를 함에도 치료 현장에서는 불교 용어를 하나도 쓰지 않습니다. 불교 수행과 공부, 관찰을 통해서 터득한 보편적인 지혜에 바탕을 두고,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반적인 말을 써서 치료를 진행합니다. 또 불교라는 종교가 거부감을 주거나 문제가 될 때는 불교정신치료라는 말 대신 지혜치료(wisdom therapy)라는 말을 씁니다. 치료자의 경험과 앎이 보편적인 것, 즉 지혜여서 그것을 토대로 치료 작업을 할 때 환자의 종교 배경과 상관없이 도움이 되어야 치료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지혜치료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불교가 사실은 지혜이니, 불교정신치료와 지혜치료가 같다고 봐도 크게 틀린 건 아닙니다.
정신치료로서 불교의 강점은, 인간 존재 자체를 괴로움으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 존재가 괴로움일까요? 우리가 바라는 것과 실제 상황이 늘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고 싶은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고, 혼자 있고 싶지 않은 데 혼자 있어야 해서 괴롭습니다. 인정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괴롭고, 살찌고 싶지 않은데 살이 쪄서 힘듭니다. 이러한 예는 이밖에도 도처에 무수히 깔려 있습니다. 이렇게 무수한 괴로운 상황에 처한 것만도 힘이 드는데,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향해 화를 내곤 합니다. 괴로움으로 불타오르는 거지요.
원하는 대로 안 되어서 괴로우니, 내가 원하는 것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없애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불교의 처방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실제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걸 강조합니다. 정확하게 보고서 일어날 수 없는 건 바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본다는 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내 몸과 마음의 속성,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