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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누드’를 탄생시킨 ‘결장암’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 승인 2020.09.1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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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질병 때문에 화가가 되었고 또 질병 때문의 그 화법을 바꾸어 유명해진 화가가 있다. 프랑스의 화가 마티스는 원래는 법학을 공부하는 법학도 이었으나 그가 21세 때 화가로 전향하였는데 그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1889년 가을 그에게는 갑작스럽게 걷잡을 수 없는 복통이 시작되었다. 병원에 가 진찰한바 당시로서는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던 충수염(한간에서는 맹장염 이라함)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복막염으로 번지고 있어 수술 후에도 상당기간 거동할 수 없어 집에 머물러야 했다. 하루의 생활이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화구와 종이를 사다 주었다. 처음에는 작란삼아 그림을 그렸으나 자기도 몰랐던 그림의 재간을 발견한 마티스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공부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화가가 되었다. 결국은 충수염이 그를 화가로 인도한 셈이다. 마티스는 20세기 전반의 회화양식을 크게 변화시켜 회화사에 남을 업적을 쌓아올리는 거장이 되었다. 그는 70세 까지는 건강하게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40년 봄에 결장암(結腸癌)으로 인한 장폐쇄증(腸閉鎖症)이 생겨 사경을 헤매다가 수술로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수술창의 감염으로 고생하였으며 또 감염은 낫은 후에는 그 상처의 반흔(瘢痕) 때문에 이번에는 탈장(脫腸)이 생겨나 퇴원 후에도 일어설 수가 없어 화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침대생활을 하여야 했으며 손가락은 관절염 때문에 부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른 예술적 표현방법을 모색하여 낸 것이 ‘색종이 오려붙이기(色紙作品)’이다. 즉 설 수 없고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누어서 색종이를 오리는 방법을 착안 했던 것이다. 그에게 손가락의 관절염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몇 번의 수술을 요하는 위장계 질병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의 색지 작품과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1954년 가을 그에게는 세 번째의 치명적인 병이 생겨났다. 고열과 함께 황단 그리고 심한 상복부의 동통 때문에 다시 병원으로 입원하게 되었으며, 내린 진단이 담석(膽石)으로 인한 담낭염(膽囊炎)이었다. 몸이 쇠약해져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상태라 그대로 퇴원하여 집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출장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티스는 통증이 좀 가시면 색종이 오리기를 계속하였다. 그의 색종이 작품 중에서 푸른 누드 l-lV 라는 작품은 앉아있는 여인의 누드를 포착한 것인데 누드라고는 하지만 인체의 관능미와는 달리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형태만을 표현한 것이다. 푸른색의 시원함은 가장 잘 살려주는 이미지로서 이 누드가 고안되었다.

마티스 작 ‘푸른 누드 III' 니스, (1952) 마티스 미술관

푸른 누드Ⅲ은 마치 석기시대의 작품인 빌렌도르프 비너스(vinus of willendorf) 상(像)을 연상하게 한다. 이 시대의 미인이라는 개념은 신체가 살찌고 든든하며 힘이 세서 산야를 달리며 수렵하고, 먹거리를 확보하고 출산과 수유의 능력이 탁월한 뚱뚱한 여인이 참다운 미인으로 꼽혔다. 이런 것을 연상시킨 여인상이 바로 마티스의 푸른 누드Ⅲ으로 생각된다. 신체는 크고 건강해서 머리와 손 그리고 하지의 일부는 화면을 벗어났고 거대한 유방과 커다란 허벅지는 육체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여성으로 또 대지(大地)로서 생명을 낳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것같이 보인다. 그 탐스럽고 믿음직스러움으로 보아 공동체의 질서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을 것으로만 보인다.

마티스 작 ‘푸른 누드 II' 니스, (1952) 마티스 미술관

그의 작품 푸른 누드Ⅱ는 바로크 시대(17-18세기)의 여성들의 몸매처럼 풍만하다. 즉 이 시대는 남자나 여자 나를 막론하고 부푼 몸집이 아름답다고 여겼는데 그것은 이 시대는 잘 먹고, 잘 마시는 것이 멋진 삶이었기 때문에 풍성한 만찬이 자주 있어 사람들은 적당히 살찐 모습이 신분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돼 있었다. 이것은 마치 우리말의 ‘부잣집 맏며느리 같다.’는 표현이 그것을 잘 나타내는 것 같다. 푸른 누드Ⅱ는 균형 있게 몸이 풍성하지만 특히 허리는 마치 튜브(tube) 모양으로 부풀고 있다. 이 시대 남자들은 좀 더 살쪄 보이기 위해 허리와 허벅지에 솜을 넣었고, 여성들은 가슴과 살찐 팔뚝 그리고 볼기를 특히 강조했다는 것인데 이는 푸른 누드Ⅱ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마티스 작 ‘푸른 누드 IV' 니스, (1952) 마티스 미술관

그의 작품 푸른 누드IV는 로코코 시대의 여인의 모습이다. 이 시대에는 코르셋이 유행했다. 몸매는 날씬하여 매력적이고 우아해야했고 부풀린 크리놀린 드레스를 입는 것이 로코코 시대의 특징이었다. 코르셋과 크리놀린 드레스 같은 의상을 입은 상류층 여성들은 수동성을 강요받은 셈이었다. 그녀들의 의무는 오로지 우아하고 애교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여인상은 푸른 누드Ⅳ가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몸은 전반적으로 잘 발달되어 있는데 허리는 코르셋으로 조이건 해서 마치 개미허리와 같이 가늘어지다 못해 잘라져 나간 듯이 보이는 것을 잘 표현 되어있다.

마티스 작 ‘푸른 누드 I' 니스, (1952) 마티스 미술관

그의 작품 푸른 누드I은 자신의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것에 신경 쓰는 여성의 모습이다. 그녀들은 코르셋으로 몸을 죄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음식을 적게 먹거나 굶는 것으로 즉 다이어트로 귀결하게 되었다. 현대 여성들이 직업전선으로 뛰어들면서 여성들의 옷장에서 코르셋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것은 코르셋으로 조이고는 활동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등장된 것이 브래지어이다. 새로운 자유를 누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즉 코르셋이 사라진 뒤 여성들의 신체를 관리하는 수단으로 등장된 것이 다이어트였다. 다이어트의 기능은 단지 몸무게를 조절하는 것 이상이다. 날씬함에 대한 강박관념은 새로운 코르셋이 되어 여성들을 강박 하게 되었다. 즉 날씬함에 대한 강박관념은 새로운 코르셋이었다. 푸른 누드I
의 유방은 브래지어로 크게 보이고 몸 전체는 다이어트로 날씬하게 발달되었으며 특히 배와 허리는 서로 맞붙을 정도로 가늘어져 보인다. 이는 영락없는 현대 여성들이 원하는 몸매를 나타내고 있다.

마티스의 푸른 누드I-IV는 마치 고대의 여인의 몸매에서 현대 여인의 몸매에 이르기까지 잘 표현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몸매를 분류하는데 기본형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되고 또 몸매를 논하는데 외모만으로 할 것이 아니라 내모도 포함시켜야 함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어 더욱 값진 작품으로 생각된다.

마티스 작: ‘푸른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인’ (1939) 산 페텔스브르그, 에르미타지 미술관

그의 작품 ‘푸른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1939)’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모델은 다름 아닌 마티스의 비서였던 리디아 델레츠토르스카야(Lydia Delectorskaya)이며 이 그림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그림이다. 리디아는 1910년 러시아 의사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모를 잃고 러시아에서 떠나 프랑스 니스로 망명 온 처녀였다. 그녀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화가는 그녀를 스튜디오 비서로 채용하였다.
3년이 지나자 마티스는 리디아에게 모델을 서줄 것을 요청하고 리디아는 마티스의 요청에 응해 모델을 서게 되었다. 그 때 리디아의 나이는 25세, 마티스는 65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리디아는 마티스에게 길들여지게 되고 마티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마티스 부부에게 위기를 몰고 왔다.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에(Amélie)는 남편에게 최후통첩을 하고 남편 곁을 떠나고 말았다.

마티스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리디아는 1954년 11월 3일 마티스가 사망하기 전날, 마티스가 입원하고 있던 병실을 찾았다. 마티스는 볼펜으로 그녀를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해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주인공은 바로 리디아이었다.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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