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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골 느티나무 아래서

나뭇가지에 걸린 고전(19)

  • 입력 2020.09.23 08:47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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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마지막 개울을 건너, 느티나무 숲은 이미 한 마을이다. 어두워지는 저녁이라 아무도 없지만 늘 분주하다. 한지(韓紙)가 달린 금줄로 둘레를 친 당 집은 신주(神主)가 지키고 있다. 느티나무 큰 가지에서 우두커니 조는 듯한 올빼미는 범접 못할 문장 어른, 늘 열심히 글 읽는 쓰름매미 학동, 부지런히 나무를 다듬고 있는 딱따구리 목수, 낮은 소리로 “꾹꾸꾹꾸, 영감 죽고 자식 죽고 어이하나어이하나”라 한탄하는 비둘기 과부까지 모두들 모여 산다.

5일 장터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개울을 네 번 건너면 아스라이 느티나무 당 숲이 보인다. 보리 벤 들판을 세로로 질러가서 집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멀리서 쓰으름, 쓰으름, 쓰름매미들의 요란한 합창이 들려온다. 당 숲 느티나무들은 마을을 다 가리고도 남는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애태웠던지 다섯 그루가 모두 속이 비어 있다. 제일 큰 구멍에는 사람이 들어가 밤 지어먹을 만큼 크다. 단오 날 느티나무에 맸던 그네 줄은 잘려나간 채 하릴없이 바람을 타고 있다.

병자호란 때 고향마을 출신 영천이씨 한 의병장은 말을 타고 느티나무를 한 바퀴 돈 뒤 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전투 중에 전사한 시신을 등에 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말은 주인과 함께 당 숲 뒤 서낭재 말뫼에 묻혔다. 마을 어귀 선암(仙巖)에선 바위틈 늙은 느티나무가 구불구불 울퉁불퉁 뿌리를 내어 집채만 한 바위를 단단히 껴안았다. 또한 넉넉하고 웅장한 자태로 짙은 나무그늘을 만들어 동리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준다.

석류꽃이 피기 시작하는 초여름이면 느티나무 초록 잎들은 짙푸르게 되어 풍성한 그늘을 만든다. 이런 광경을 정지용 시인은 해방 직후 해방기념 조선문학가대회 때 자식을 대신 보내, 그가 직접 번역한 왕유(王維, 唐시대 759년 사망)의 한시(漢詩) 한 수를 낭송하게 했다 한다.

榴花映葉未全開 유화영업미전개/

석류꽃 잎에 어울려 봉오리 아직 피지 않고

槐影沈沈雨勢來 괴영침침우세래/

느티나무 그늘 침침하니 비 올 듯도 하이.

小院地偏人不到 소원지편인부도/

집 적고 휘진 곳이라 오는 이도 없고야

滿庭鳥跡印蒼苔 만정조적인창태/

삿삿히 밟은 새 발자욱 이끼마다 놓였고녀.

시인다운 멋진 번역이다. 초여름 날 석류꽃은 저 비를 맞고야 봉우리를 활짝 피어낼 태세다. 뜰 이끼에 도장 찍는 새 발자국은 까칠한 산새의 종종 걸음을 연상시킨다. 금세라도 느티나무 그늘의 석류 잎을 소란스레 밟고 지나는 빗방울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느티나무는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나무다. 전국 어디를 가나 오래된 동네 앞을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다. 향교나 서당 옆에 세운 초등학교 뜰이나, 관청 터에도 어김없이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창덕궁 비원에도 느티나무 여러 그루가 터를 잡고 있고, 조선 건국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는 근래에 죽었지만 그루터기는 아직 남아 있다. 수원 화성에도 느티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나무 집에서 나서 소나무를 먹고 살다가 소나무 관에 묻힌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평민들과 달리 양반은 느티나무로 지은 집에서 느티나무로 만든 가구를 놓고 살다가 느티나무 관에 실려 저승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목재로서의 느티나무의 가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느티나무는 한국, 중국 동북부, 일본에 자생한다. 신라시대 천마총에서 나온 관이나 안압지에서 발굴된 배는 느티나무라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오래된 사찰들은 느티나무가 기둥인 예로 흔하다.

이처럼 느티나무의 목재는 우리나라에 나는 나무 중에서는 제일로 친다. 또한 무늬와 색상이 아름답고 중후하여 규목(槻木)이라고도 하고, 그 무늬를 구름무늬(雲龍紋)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나무는 살아서는 그 기상을 높이 평가 받지만, 죽은 목재로서는 느티나무와 사뭇 다른 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느티나무 목재의 선호는 지금까지 남아 고급주택에서는 마루나 계단의 목재로 느티나무를 사용한다. 그밖에도 힘을 받는 구조재서 불상 등을 만드는 조각재, 음향이 좋아 악기재까지 이용되는 등 느티나무의 목재로서의 용도는 다양하다.

조선 중종 때 최세진(崔世珍)이 쓴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느티나무를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느티나무를 ‘누른 홰나무’ 란 뜻이라고 했다. ‘누른’은 느티나무가 껍질이 누렇고 단풍이 누렇게 드는 모습에서 왔다. ‘누른 홰나무’가 ‘누튀나모’가 되었고. 이게 ‘늬티나무’를 거쳐 느티나무가 되었다. 홰나무는 괴목(槐木)이란 말에서 왔다. 중국에서는 느티나무를 괴목(槐木)이라 했는데 우리나라 들어오면서 훼, 홰 등으로 발음하였다. 괴(槐)자는 나무 목(木)과 귀신 귀(鬼)가 합쳐진 글이다. 느티나무가 건강하고 크게 오래 살아서 인지 옛사람이 영험하게 여겼다.

≪훈몽자회訓蒙字會≫의 저자 최세진은 충북 괴산(槐山) 출신인데, 괴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신라의 장수 찬덕(讚德)이 가잠성(椵岑城)을 지키고 있을 때 백제의 대군이 침입하여 고립되자 항복하지 않고 큰 느티나무에 머리를 받아 자결했다고 한다. 이에 태종무열왕이 장수 찬덕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괴양(槐壤)이라 이름 붙였고,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괴주(槐州)를 거쳐 괴산(槐山)으로 바꾸었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무 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중국에서 괴(槐)로 불리는 또 다른 나무는 홰나무가 있다. 노박덩굴과인 회나무는 크게 자란다는 점 외에는 느티나무와 공통점이 없다. 꽃도 잎도 완전히 다르다. 회화나무라 부르는 회나무는 아주 써서 소태나무라 하고 독이 있어 벌레들이 가까이하지 못한다. 반면에 느릅나무 과인 느릅나무, 시무나무, 느티나무 등은 어린잎이 맛이 좋아 쪄 먹을 수도 있으니 독이 없다.

내 외가 동네인 지내리 동구에도 느티나무 고목들이 서 있고, 남양홍씨 입향시조를 모신 삼괴정(三槐亭)이 있다. 《산림경제 (山林經濟)》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중문 안에 심으면 세세부귀를 누린다. 신방(申方) 서남간에 심으면 도적을 막는다.’고 했다. 느티나무를 정승(政丞)나무라고도 했으니, 삼정승이 나오라는 간절함으로 삼괴정을 지었을 터이다. 어릴 적 외갓집 가는 길은 멀고도 무서웠다. 오솔길에서 노루도 놀랐고 나도 놀랐던 장초시(初試) 재궁을 지나, 낙동강을 나룻배로 건너 신선이 놀았다는 구선대(九仙臺) 얼음판을 조심조심 걸어, 마침내 저 멀리 느티나무 숲이 보이면 외가에 온 설렘으로 지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먼 곳 여행은 꿈도 못 꾸고, 외갓집 다녀오기만 해도 행복해 했다.

결혼 후 아내와 선산에 인사하고 오는 길에 선암골 고향에 잠시 들렀다. 농막으로 빌려준 고향집은 집이 커서 더 퇴락해보였다. 허리 굽은 막내 종조모님께서 번개 같이 종부(宗婦)가 왔다고 고추장으로 간을 한 붕어찜을 반찬으로 점심을 해주셨다. 아내는 지금도 무척 맛있었던지 종조모님의 고마운 붕어찜 얘기를 한다. 동구를 나오며 내 책거리로 어머님이 증조부님께 인절미 해드리는 날, 천자문 끼고 선암을 돌아왔던 기억이 났다. 선암 아래로 갔더니 빡빡머리 아이들이 느티나무 아래서 놀고 있었다. 그때 내 모습이었다. 어린 내가 맨발로 겨우 올라갔던 바위는 왜소하여 한 걸음에 오를 수 있었다. 쓰름매미는 예처럼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댔고, 느티나무 고목은 아직도 너래 바위를 단단히 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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