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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언젠가는 양엄마를 사랑할까요?

  • 입력 2020.10.20 14:50
  • 기자명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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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제가 잘 아는 미국인 간호사가 몇 년 전에 동구 유럽에 갔습니다.
40세가 넘도록 직장과 학문에만 전념해 오던 그녀는 어느 날 중대한 결심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고향인 동구 유럽이 자유로운 세계가 되었고, 고아들이 처참하게 버려져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아기를 한 명 데려다 기르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자신이 두고 왔던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늘 갖고 싶던 아기를 양자로 삼겠다는 결심이었답니다.

폴란드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보육원으로 안내되었고, 자신에게 웃으면서 다가와서 안기는 다섯 살배기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소녀는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이 전혀 없이 ‘양엄마’의 손을 잡아끌며 호감을 보였답니다. 불안에 차 있던 제 친구는 너무나 기뻐서 당장에 ‘k’를 양녀로 수속 후 보육원을 나왔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비행기에 들어와서 둘이 되자마자 ‘k’는 떼를 쓰고, 음식을 던지며, 잠을 한숨도 자지 않더랍니다. 어찌나 혼이 났는지, 제 친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소아정신과 의사에게로 곧장 달려왔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k’는 키가 좀 작고, 왜소한 것 이외에는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나, 길거리에서 누구를 만나도 성큼 손을 잡고 따라가는가 하면 새로운 친구에게도 대뜸 말을 걸어서 친한 듯이 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피상적인 ‘친밀함’은 수 분 내지 수 시간 정도에 그쳤습니다. ‘k’는 곧장 친구들과 싸움을 하거나 떼를 써서, 금방 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른 중에서도 아무도 ‘k’를 보아주거나 Baby Sitting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떼를 쓰고, 말을 안 들으며 위험한 짓을 할 때가 많으니까요.

갓난아기 시절에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거나 전쟁 등으로 인해서 ‘어른과의 유대’가 형성되지 못한 아이 중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어른을 보면 심하게 놀라거나, 피하려는 절대형(Inhibited형)이 있고, 그 반면에 ‘k’처럼 조절이 안되는 비절제형(Dis-inhibited형)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어둡고, 상처가 심한 과거력을 가진 아이들은, 그 이후에 사랑이 많고 풍요로운 가정에서 양육을 받는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문제 행동아’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k’는 지금 14살이 되었는데도 늘 엄마와 갈등이 많고, 학교생활도 간신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부모와 함께 피난을 나온 월남난민촌의 청소년이나 어린이들은 미국에서의 적응이 훨씬 양호하다고 합니다. 이런 보고서를 읽으면서 저는 문득 한국 전쟁 이후에 미국에 양자로 왔던 한국인 전쟁고아들을 연상해 봅니다.

마치 월남에서 피난 온 청소년들이 아무리 외부사정은 비참하더라도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때문에 적응에 성공한 것처럼, 한국의 전쟁고아였던 우리의 입양아들도 갓난아기 시절의 ‘사랑의 기억’이 미국 생활에서의 성공을 이루는데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k’의 경우, 친부모는 술주정뱅이였고, 아이를 학대하다 못해 아버지가 성추행까지 했다는 보육원일지를 기억하면서도, 제 친구는 ‘k’가 언젠가 새엄마를 사랑하게 되리라 애타게 고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이나 주의 주고,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개인주의가 난무하는 현대의 서양문명 속에서, 저는 저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저의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그 어머니를 사랑해 주신 할머니와 그분의 할머니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분들은 한 살배기 이전의 갓난아기들에게 노래를 해주고, 업어주고, 만져주면서 ‘이 세상은 믿고 살만한 곳’임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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