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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홰나무들

Essay / 나뭇가지에 걸린 고전(19)

  • 입력 2020.10.21 08:32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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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토요일 오후 반나절 수업을 끝낸 중‧고등학생들이 임청각 앞 홰나무 그늘에 하나, 둘씩 모여든다. 넉넉한 홰나무 그늘로 불어오는 낙동강 강바람이 여간 시원치 않다. 이제 여남은 명이 모였으니 고향으로 출발한다. 임청각을 좌편으로 하고 중앙선 철길 아래 굴을 지나면, 철길 옆 바로 곁에 법흥사지7층전탑(국보 제16호)이 꿋꿋하게 천년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주말이면 늘 이곳에서 길동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루 한 번 고향 면사무소까지 가는 버스가 있긴 하지만, 회나무 밑에서 일찍 만나 4시간 걸어가면 버스와 도착시간이 같았다. 이 홰나무 밑에 모이면 늘 전해오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 홰나무는 귀가 있어서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며, 가지 하나만 꺾어도 큰 해가 미친다고도 했다. 오가는 말을 알아듣기나 하는지, 홰나무는 가지에 걸친 빛바랜 한지 금줄을 바람에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고학년 형은 교과서에도 나온다며 임청각 사랑채가 군자정(君子亭)이며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용선생의 고택이고, 선생이 만주에서 세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청산리전투를 이끌었다고도 했다. 청산리 전투에 승리하는 날 어이 알았던지, 군자정이 울었다는 대목에서는, 나도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7층 전탑 옆을 지날 때는 몇 개 남은 지붕의 기와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겠고, 시멘트로 때운 기단 아래 팔부중상(八部衆像)은 풍화로 희미해졌으나 무척 빛나는 솜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홰나무 아래 낙동강에는 물속에 박아놓은 오래된 나무 기둥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낙동강 수심이 깊을 때 사용하던 부두다. 멀리 남해바다 김해로부터 올라온 소금 배들이 여기 머물렀다. 그 옛날부터 강원도 황지나 봉화의 춘양에서부터 내려온 금강송 황장목들과 예안면 부포들과 월곡면 수대들의 쌀과 절강 강변의 야산의 장작들이 강물을 따라 여기까지 내려와 홰나무 앞에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회화나무가 2008년 8월 22일 새벽 3시경 누군가에 의해 베어져 버렸다. 당시 안동 사람들의 놀란 심정을 안동 지역 한 방송의 뉴스가 이렇게 전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홰나무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족히 300년은 더 되었을 그 나무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했고, 그 나무에 대한 사연은 얼마나 많을까. 교통에 불편하다는 불평도 있었지만, 홰나무가 베어지고 보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안타깝다. 그 나무도 한 문화인데 그 오랜 역사를 잊어버리고 현실의 편리만 추구하는 우리들의 짧은 생각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이 홰나무는 원래 석주 이상용선생의 99칸 집 대문 앞에 있던 나무다. 일제는 석주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솔권하여 가신 후, 중앙선 철길을 직선으로 만든 것이 훨씬 쉬운데도 임청각을 반쯤 헐고 일부러 한참 돌아가게 냈다. 석주선생님이 미워서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이 홰나무를 베 없앤 때인 2008년에는 벌써 법흥7층전탑(국보)을 보호하고 임청각을 복원하고자 중앙선 철도 이전이 공론화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 나무를 더욱 영험한 신목으로 여기게 된 사연은 이렇다.

오랫동안 인근 무속인들이 이 홰나무에서 내림굿을 해왔으며, 정월 대보름에는 금줄을 치고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1970년대 초부터 안동댐 건설 때 수많은 대형트럭이 지나다니면서 방해가 된다고 인부를 시켜 홰나무 가지를 베었다가, 가지를 벴던 인부가 새벽에 갑자기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번에는 중장비를 동원하여 제거하다가 포클레인 삽날이 부러지며 하마터면 불상사가 날 뻔한 일까지 발생했다. 당국에서 그 나무를 베면 상당한 돈을 준다고 공고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영험한 이 홰나무에 불경한 짓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고목 홰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회화나무 앞이 바로 남해바다 김해에서 안동으로 배가 들어올 때 포구였던 사실과, 석주선생님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 안동댐 건설과정 등 홰나무와 얽혔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 홰나무에 해마다 단오 때면 그네를 매어 그네타기 대회를 열었고, 6.25로 안동초등학교가 폭격으로 부서졌을 때는 이 홰나무 밑에서 수업을 했다고도 한다. 이 홰나무를 두고도 강 쪽으로 얼마든지 도로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지금이라도 그루터기를 없앨 게 아니라 그 자리에 홰나무를 새로 심었으면 좋겠다는 시민들도 아직 적지 않다.

지금도 안동 각 문중 종택이나 서원문 밖에는 어김없이 홰나무가 서 있다. 이런 홰나무는 고려 공민왕이 몽진 때 친필로 쓴 안동웅부(安東雄府) 현판이 걸려 있던 옛 군청 마당인 안동 대도호부 동헌에도, 옛 향교 터인 시청 마당에도, 도산서원 광명실 앞에도, 집성촌인 소산, 하회, 내앞, 가일, 오미, 하리 마을 종택 앞에도 모두 홰나무가 있다. 심지어 임하댐으로 수몰 위기에 처한 임동면 수곡리 전주류씨 종택 앞 홰나무는 수몰이 안 되는 곳으로 옮겨심기도 했다. 특히 안동시 서후면 학봉선생 종택의 300살 넘는 아름다운 홰나무는 해 질 무렵 그 실루엣을 정말 볼만하다.

천 원 지폐 뒷면 그림은 강세황(1712∼1791)이 그린 도산서원의 실경도가 바탕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도 커다란 홰나무가 있다. 수령 400년이나 되는 서원의 상징이던 이 나무가 안타깝게도 2001년 죽어버렸다. 말라버린 이 홰나무에 담쟁이 잎과 능소화가 덮고 있어서 아직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계 홰나무를 심어 옛 모습을 꼭 이어갔으면 좋겠다.

요즘도 안동 시내 곳곳에 홰나무 거목이 많은데 이는 명재상 맹사성이 심은 나무라 한다. 맹사성이 안동 부사로 부임하여 남문을 나와 서악사(西岳寺)로 순찰하는데 여기저기에서 여인의 슬픈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도 이상하여 그 연유를 물은즉 안동에는 오래전부터 젊은 과부가 많았는데, 바로 그 울음소리는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곡성이라 했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살펴보니, 낙동강과 반변천이 방아다리처럼(Y자) 흐르는 등 과연 안동은 과부가 많이 날 형국이었다. 이를 막기 위하여 거리 곳곳에 홰나무를 목숨 수(壽)자 심게 하였더니 그 후로는 과부가 더 늘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홰나무 중에서 가장 큰 나무는 안동에 바로 인접한 의성군 의성읍 도서동의 홰나무다. 이 홰나무의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8m, 둘레 10m 정도라 한다. 사십여 년 전 잠시 의성읍에 부친이 조부님 모시고 사실 때 조부님을 모시고 가본 적도 있다. 위에 잎과 가지들이 없다면 나무둥치는 나무라기보다는 검은 바위 같았다.

어릴 때부터 내가 나무나 풀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소가 먹을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어린 나는 모든 식물은 소가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나누었다. 소는 콩과식물을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홰나무는 콩과식물이지만 잎은 아주 써서 소가 먹을 수 없다. 회화나무의 특수한 향이 난다. 이 향 때문에 200m 이내에는 모기와 파리의 유충이 생기지 않는다.

내 고향 집 바로 뒤에도 커다란 홰나무가 있었다. 안동 시내서 회나무 밑에 모여 출발하여, 회나무가 보이면 고향 집에 도착했다. 이 홰나무 뿌리 바로 밑에 우물이 있었다. 홰나무 우물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오래 산다고 했다. 내 직계로 5대까지 남성분들은 모두 여든을 넘게 사셨다. 안타깝게도 이 홰나무도 마을 골목길을 넓히면서 베 버렸고 우물까지 없애버렸다. 만약에 내가 고향에 다시 집을 짓는 꿈이 이루어진다면 다시 홰나무를 심어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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