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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과 상드의 초상’을 그린 ‘결핵성 후두염’외젠 들라크루아 (Eugene Delacroix)
  •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 승인 2020.11.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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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19세기 최초의 낭만주의 선두주자 격인 화가 외젠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는 불타는 듯한 색채와 율동감을 특기로 하는 화가로서 서양 미술사의 흐름에서 미(美)에 도덕이나 규범적 강제가 개입되는 것에 본격적으로 저항해 추(醜)를 다시 미의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광범위하여 종교, 신화, 문학, 역사로부터 풍속, 인물 풍경, 정물 등의 전 영역에 걸쳤으며, 벽화장식을 포함한 유채화 853점 외에 데생화 6629점, 수채화·파스텔화 1505점, 판화류 133점, 화첩 60점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제작하였고, 예술상의 깊은 성찰을 기술한 일기, 평론, 서간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의 생애로 볼 때 어려서는 허약하여 자주 병에 시달렸으며 특히 요람이 불타는 바람에 화상을 입어 그로 인한 흉터는 흉하게 남게 되었다. 또 하나 그를 가슴 아프게 한 사연은 그의 호적상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고 실부는 따로 있었다는 소문에 어려서부터 시달리어야 했다.

들라크루아 작 : ‘묘지의 고아’ (1823) 루브르 미술관

그가 22살이 되는 1820년에는 원인 불명의 발열로 고생하게 되었는데 전기 작가들은 결핵성 후두염에 감염 되었으며 이것이 그를 평생 괴롭히다가 사인이 된 병을 이 시기에 얻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그가 그린 그림이 ‘묘지의 고아’ (1823)이다. 젊은 처녀가 묘지를 배경으로 입을 벌린 채 커다란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눈은 강하고 분명하나 어떤 허무한 유한(遺恨)을 품고 있는 것 같으며 힘없이 벌린 입에서 말 없는 호소가 들리는 것 같다. 이 그림은 마치 화가가 자신의 고뇌를 묘지의 고아를 통해 강력히 표현한 그림인 것 같다.

들라크루아는 그림을 구상하고 작품화하는 데는 그가 문학 서적을 많이 숙독한 다독가라는 면도 있겠지만 당시 피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많은 예술가와 사귀었으며, 특히 여류 작가 조루즈 상드(George Sand) 그리고 천재 음악가 프레더릭 쇼팽(Fryderyk Chopin)과의 긴밀한 교류는 그가 그린 초상화로 남아 있다.

들라크루아 작 : ‘들아크루아의 초상’ (1837) 루브르 미술관

그가 1838년에 그린 쇼팽과 상드 그리고 자신의 자화상(1837)을 보면서 그 그림에 얽힌 세기의 음악, 문학 그리고 미술 거장들의 만남과 그림 뒤에 가려진 그들의 병적을 통해 당시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결핵의 실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들라크루아는 쇼팽의 인품과 예술적 정열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자기의 파리 작업실에 피아노를 일부러 준비하고는 쇼팽을 초청하여 그의 연주를 감상하곤 했다. 그리고는 그의 피아노 소리는 마치 소쩍새의 울음과 장미의 향기를 합쳐놓은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쇼팽의 연주하는 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그의 내면까지를 그려낸 걸작이라는 평이다. 밤색 머리, 갈색 눈, 높은 코, 약간 갸름한 그의 얼굴에서는 귀족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항상 창백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특히 눈길을 끄는데 실은 이 무렵 그에게는 폐결핵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를 그리는 화가 자신도 결핵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쇼팽은 33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한 친구이자 의사이었던 장 마투진스키와 오랫동안 동거하며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건강하던 쇼팽이 미열과 객혈(喀血)을 동반하는 중병에 걸렸다. 이 때문에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그가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그의 사생활에도 커다란 변동이 생겨났다. 그와 장래를 약속하였던 여인 마리아 보드친스카와의 약혼이 그의 발병 소문 때문에 파혼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음악가 리스트는 쇼팽을 위로하기 위해 조르주 상드라는 여류 작가를 그에게 소개하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쇼팽은 그녀의 활발한 성격에 매료되고, 그리고 검은 눈동자에 반했다. 그녀는 18세에 결혼하여 이미 두 아이를 낳고 이혼한 경력이 있는 부인으로, 그 후 문단에 데뷔한 인기 여류 작가였다.

항상 남장(男裝)을 하고 시가를 물고 다니며 몇몇 남성과 내연의 관계를 맺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처음 본 쇼팽은 한눈에 반해 버렸고, 그녀 또한 쇼팽이 좋아 그들은 곧 동거 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미 쇼팽에게는 폐병이 진행되고 있어서 상드와 같이 괄괄하면서도 어머니 같은 느낌의 여인으로부터의 애정과 간호가 절실한 때 이였다. 후세는 이들의 만남을 음악과 문학의 만남이라고 평한다.

들라크루아 작 : ‘쇼팽의 초상’ (1838) 루브르 미술관

들라크루아가 1838년에 상드와 쇼팽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실은 따로따로 그린 것이 아니라 쇼팽이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그리면서 그 배경 그림으로 상드를 그렸던 것이 둘로 갈라졌다. 그림이 둘로 나누어진 것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상드는 정열적이고 모험심이 강하며 변덕이 심한 여자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상드를 중후한 멋을 풍기는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무렵 유럽에서 결핵은 인구의 약 80%가 감염됐을 정도로 널리 퍼져있던 병으로 런던에서는 전 인구의 14.3%가 결핵으로 사망했고, 파리에서는 인구의 18%가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들라크루아 작 : ‘상드의 초상’ (1838) 오드럽 가드 컬렉션

물론 로버트 코호가 결핵균을 발견한 것이 1882년이니까 들라크루아와 쇼팽이 결핵에 감염되었을 무렵에는 결핵의 원인과 그 전염성 및 치료에 관해서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치료는 순전히 대증요법에 의존하던 때이다.

결핵에 감염된 예술가 중에는 병에 굴복되지 않고 투쟁심이 강해져 이것이 작품 활동에 오히려 자극이 되어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을 여러 명의 예술가에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폐결핵 환자를 폐로성 정열(肺勞性 情熱, seps phthisica)이라 해서 이 병에 걸리면 희망과 창조성이 용출되고 흘러넘치는 독특한 마음 상태로 되는데 대개는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 이병에 걸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창작 능력이 고도로 향상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창작에 종사하는 예술가들은 은근히 이병에 걸리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1830년대 파리의 예술가들 간에도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쇼팽과 들라크루아가 이러한 폐로성 정열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이 무렵에 들라크루아가 두 사람의 초상화와 자기의 자화상을 남긴 것은 음악, 문학, 미술의 당대 거두들의 만남의 소중한 증표이며 그 그림 중에는 숱한 사연과 곡절 그리고 병적이 수며 있어 이를 다 표현하려면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자기의 자화상을 그린 5년 후부터 병이 무거워져 산과 바다의 휴양지로 좋다는 곳을 전전하면서 투병에 전념하였으나 그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862년부터는 작품 활동은 전연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은 쇠약해 졌으며 1863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자리에 누어야 할 정도로 병은 악화 되어 같은 해 8월 3일 오전 6시에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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