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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 개살구로 살고 싶다

  • 입력 2021.02.04 08:30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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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마당 가득 봄비가 내린다. 살구나무 가지엔 분홍 꽃망울이 다닥다닥 달려 있었고 두엄더미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올라온다. 비 오는 날이면 할아버지는 돗자리를 엮으신다. 달그락 달그락 고드랫 돌 소리를 따라 할아버지의 손끝에서 왕골이 엮어져 격자무늬 고운 돗자리로 태어난다. 상큼한 왕골풀 냄새가 방안에 가득하다. 어린 나는 먹 갈고 붓 적셔 신문지 위에 서툰 글씨로 ‘소년이노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을 써 내려간다. 할아버지는 “이룰 성(成)자 끝에서는 붓끝이 금방 올라가지 말고 힘을 주어 잠깐 쉬었다 올라가야지!”하시며 말끝에도 힘을 넣으신다.

살구꽃은 잎이 피기도 전에 핀다. 활짝 핀 살구꽃보다 피기 직전에 한껏 부푼 꽃망울이 더 사랑스럽다. 마치 웃음을 억지로 참는 내 딸아이의 어릴 적 모습 같다고나 할까. 살구꽃은 질 때도 아주 깨끗하게 진다. 살구꽃이 지고 나면 곧 제비 입 같은 새잎들이 나온다. 꽃이 지고 막 새잎이 나오는 살구나무 가지는 젊은 여인이 눈 화장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부끄럽고 약간 어색하여 더 아름답다. 이후 배꼽처럼 말라버린 꽃이 작은 살구 알에서 떨어지면, 풋살구 알들은 잎 뒤로 숨어버린다.

살구가 노랗게 익어갈 무렵이면 보리도 익는다 하여 맥추(麥秋, 보리가을)라 한다. 도리깨 휘추리가 휙휙 하늘을 가르면, 보리 이삭들은 산산이 부서져 보리알로 태어난다. 농부의 이마에선 구슬땀이 맺히고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 땀 밴 베적삼 안으로 보리 깍지가 들어간다. 다른 곳은 털어낼 수 있지만 등에서 깔딱거리는 보리 깍지는 참을 수가 없다. 농부는 아내를 불러 등목을 한다. 소가 쇠마답을 비운 사이에 멍석 깔고 도리깨 자루로 쇠마답 옆에 선 살구나무에서 살구를 턴다. 새콤달콤한 살구를 안주로 막걸리 한잔하며 더위를 식힌다. 곧 장마가 올 테니 어서 빨리 보리타작을 끝내야 한다.

봄꽃 지고/ 잊힐 듯 말듯 한 그곳에

휘파람새가/ 휘리릭

살구 알 색깔로 날아들었다//

군침 참고 한참을 쳐다본다//

초록 잎에 숨은/ 연노란 살점의 유혹이

휘파람새를,/ 나를 이리도 아찔하게 만들까?//

아삭 한입 깨물어 본다/ 파- 

풋 여름 맛에/ 한낮 졸음이/고무신 들고 줄행랑친다

- 살구 / 신종찬 -

의료계를 아름답게 불러 흔히 행림(杏林)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런 고사 때문이다. 중국 오나라의 여산 지방에 명의로 이름난 동봉(董奉)선생은 환자를 치료해주고 돈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뒷산에다 살구나무를 심게 했다. 중병이면 세 그루를 가벼운 병이면 한 그루를 심는 식이었다. 뒷산은 곧 살구나무 숲을 이루었고, 그는 살구가 익으면 내다 팔아서 곡식을 사 창고에 두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다. 이후 사람들은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원을 행림(杏林)이란 이름으로 대신했다.

공자 묘(廟) 가까이에 공자님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공자 사후 한참 뒤에 제자들이나 추모하는 유학자들이 이곳 주위에 ‘행(杏)’을 많이 심어 행단이 되었다고 한다. 한데 행단의 나무가 살구인지 은행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내 생각에는 은행(銀杏)은 살구를 닮았다하여 은행이라 했으니 글자 그대로 살구일 성싶다.

삼국시대 조조(曹操)도 살구와 관련된 일화에서 그가 무척 지혜로운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조조는 자신의 마당에 살구나무를 한 그루 심어 매우 소중히 가꾸었다. 해마다 살구나무가 크며 열매가 더 많이 열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날이 갈수록 살구 수확이 줄어들었다. 평소 살구나무를 무척 아끼던 그였기에 열매가 없어지는 연유를 밝히고 싶었다. 그는 오랜 생각 끝에 하인들을 모두 불러 놓고 살구 열매가 맛이 없으니 모두 베어 버리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한 하인이 조조에게 말하기를 “이 살구나무의 열매는 참 맛이 좋은데 아깝습니다.”라고 하는 아닌가. 이리하여 조조는 살구 열매를 훔친 도둑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장미과의 갈잎 중간키 나무인 살구나무의 살구(殺狗)는 ‘개를 죽인다’는 뜻이다. 살구나무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나무의 열매, 즉 행인(杏仁)에 독이 있기 때문이다. 연분홍 살구꽃이 피는 날은 지역마다 기후 차이로 다르지만 대개 4월 5일경으로 아주 아름다운 봄날이다. 옛 선비들은 이 시기에 살구꽃을 구경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예전에는 술집에서도 대부분 살구나무를 심었는데, 두목(杜牧)의 ‘청명淸明’이라는 이 시(詩)에서 유래했다 한다. 그래서 살구꽃이 피는 마을, 즉 행화(촌杏花村)을 ‘술집’이라 부른다.

<청명淸明/만당晩唐 두목杜牧 (803 ~ 852)>

청명시절우분분淸明時節雨紛紛

청명절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노상행인욕단혼路上行人欲斷魂

길 가는 나그네 넋을 잃을 것 같네.

차문주가하처재借問酒家何處在

짐짓 묻노니, 술집이 어디에 있소?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

목동이 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

세계 3대 장수지역 중의 하나인 중앙아시아 고산지대 사람들이, 발효식품인 말린 살구 많이 먹기에 장수한다고 한다. 중국산인 살구나무는 유럽으로 퍼져나가 유럽인들이 무척 즐기는 과일이 되었다. 유럽은 위도에 따라 살구가 꽃피고 열리는 시기도 다르고 품종도 아주 다양하며 다양한 요리들도 개발되었다. 우리도 즐겨 먹는 아몬드도 살구씨다.

예부터 매화나무는 절개 있는 선비 같은 나무로 사랑을 받고 있다. 살구나무와 가장 비슷한 나무가 매화나무다. 살구나무에 매화나무를 접하면 아주 잘 되고, 자라는 모습도 거의 비슷하다. 꽃이 만개하면 살구꽃이 매화꽃보다 훨씬 예쁘다. 다만 살구보다는 매화꽃이 약간 더 먼저 피고 향기가 나는 차이는 있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로 나타났다고나 할까? 어린 가지가 녹색이면 매화이고, 적갈색이면 살구이다. 꽃이 폈을 때 꽃받침이 뒤로 젖혀지면 살구이고, 그렇지 않으면 매화이다. 어린 가지가 가시처럼 빽빽하면 살구나무다.

우리 속담에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다. 개살구는 우리나라 자생 품종이라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개살구는 살구보다 알이 작지만 붉은 빛이 돌아 훨씬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먹어보면 너무 시거나 때로는 쓴맛이 나기도 한다. 참살구와 개살구를 꽃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다만 개살구는 참살구에 비하여 나무껍질이 더 두텁고 훨씬 크게 자란다. 개살구에 ‘개’라는 접두어를 붙인 것은 사람의 관점이지, 나무의 관점이 아니다. 21세기는 다양성과 개성의 시대가 된다고 한다. 참살구보다는 개살구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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