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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얏나무와 고려의 대문호

  • 입력 2021.04.28 15:44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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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소나기를 뿌리더니 하늘이 금방 갠다. 산비탈에서 내린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룬다. 호미 들고 대문을 나서 호박잎으로 작은 물줄기를 만들고, 강아지풀로 물레방아나 돌려보자. ‘이게 웬일인가!’, 검붉은 자두가 고샅길에 널려 있고 개울물에 떠내려간다. 얼른 다래끼를 갖고 나와 자두를 가득 담았다. 잘 익은 오얏 한 알을 허벅지에 쓱쓱 닦아서 한 입 깨문다. 새콤달콤한 자두 물보다 침이 더 많이 나온다.

예부터 오얏은 우리가 여름에 즐겨 먹는 과일이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매지 말라’는 말까지 있으니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나무다. 오얏은 한 가지에 여러 개가 열린다. 장마가 한창일 때 잘 익은 오얏이 휘어지게 달린 나뭇가지는 운치 있기 그지없다. ≪천자문≫에서도 과진이내(果珍李柰)라 하여 ‘과일 중의 보배는 오얏과 능금’이라 하였다. 호두만한 크기로 중국북부나 만주가 원산지라,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며 남북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오얏의 한 품종으로 자두가 있는데, 자두는 서역지방이 원산지며 비교적 따뜻한 지방에 잘 자란다. 흔히 오얏과 자두를 혼용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두는 알이 굵고 붉고 노란 색깔을 띠는 개량된 품종을 말한다. 이 외에도 아주 검은 자두 등 다양한 품종들이 있다. 외국과 왕래가 빈번하였던 고려시대에 재래종 자두가 아닌 알이 큰 서역지방 원산인 자두가 처음 들어왔다. 고려의 대문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선생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고시율(古詩律)> 편에 다음과 같은 자두를 소재한 시를 남겼다.

<붉은 오얏을 처음 먹으면서, 유월 십이일에 / 月六日十二>

나는 처음으로 붉은 오얏을 먹었네 /

아시식주리 我始食朱李

새 도읍에는 이 물건이 없으니 /

신읍무차물 新邑無此物

옛 서울에서 왔음을 알겠네 /

지자구경지 知自舊京至

모든 물건을 옛 서울에서 공급받으니 /

범물앙구경 凡物仰舊京

옛 서울을 갑자기 버리기는 어렵구나 /

구경난거기 舊京難遽棄

하루저녁 지나면 금방 이곳까지 오긴 하지만 /

경숙거지자 經宿遽至玆

반은 이미 빛깔과 맛이 변했네 /

반이화색미 半已訛色味

이것 역시 그냥 얻을 수 있겠는가 /

차역공능득 此亦空能得

그래서 값이 뛰는 것이네 /

소이가상이 所以價翔耳

두어 개면 혼자 먹기에 충분하니 /

수개족자손 數箇足自飱

다시 먹기야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

재끽안가기 再喫安可冀

씨를 남겨 심는 것도 좋기는 하겠으나 /

유핵종역선 留核種亦宜

내 수명이 얼마 동안이나 되겠나 /

오생능유기 吾生能有幾

여기서 새 도읍지란 강화도를 말한다. 맛은 좋으나 재래종보다 빨리 상하며 두어 개면 혼자 먹기에 충분하다 했으니, 새로 들어온 알이 큰 신품종 자두를 사고팔았음이 분명하다. 당시 고려는 몽골의 거듭된 침입으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상태였다.

이규보선생은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배우기 시작하여, 14세 때에는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들이 기재(奇才)라 칭찬하였다. 23세에 장원급제하였으나 10년 동안 등용되지 못 하였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최씨 무신정권의 실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을 칭송한 한시가 눈에 들어 등용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그를 권력에 아부했다 하나,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오얏 얘기는 소설 ≪삼국지≫에도 등장한다. 조조의 군대가 물도 한 모금 못 마시고 오랫동안 행군을 하여 지칠 대로 지쳤다. 갈 길은 바쁜데 사방 어디에도 먹을 물이 없어 목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꾀 많은 조조는 꾀를 내었다. 저 언덕만 넘으면 자두밭이 있다는 거짓말을 해서, 군사들이 군침이 돌게 만들어 위기를 넘기는 ‘재치’를 보여주었다.

중국고사에 이대도강(李代桃僵)이란 말이 있다.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벌레에 갉아 먹혀 넘어지다’라는 뜻으로, ‘작은 손해를 보는 대신 큰 승리를 거둔다.’는 뜻이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서로를 위하여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를 말하기도 한다.

중국에서 이(李)씨 성의 시조는 노자(老子)라고 한다. 노자의 어머니가 오얏나무 밑을 지나길 때 산기를 느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귀가 이상하게 생겨, 이이(李耳)라고 이름 지었다한다. 다른 설(說)에는 어머니 뱃속에 72년간 살다가 늙어서 태어나서 노자(老子)라고도 한다.

오얏은 순우리말이지만, 자두는 자도(紫桃, 자주빛 복숭아)에서 온 말이다. 조선의 국성이 전주이(全州李)씨니, 오얏꽃은 대한제국황실을 상징하는 꽃문양이 되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서울 근처에 ‘오얏성씨 왕조가 들어서리라’라고 한 예언에 놀란 고려는, 한양의 오얏나무들을 모두 베어 왕기(王氣)를 없애고자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조선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때도 오얏나무가 널리 분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중한 ‘오얏나무 시’를 남긴 이규보선생은 고려 문신(文臣)이었지만, 무신정권에서 보기 드물게 종1품 재상에 올랐다. 그가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이유는 그의 높은 벼슬에 있지 않고, 방대한 저술에 있다. 특히 그의 수필작품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수필로 손색이 없다. 그의 저작을 총망라한 ≪동국이상국전집≫ 54권 14책에는 2천여 수의 시와 다양한 문체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사시 「동명왕편」, 가전체의 「국선생전」과 「청강사자현부전」, 시화 「백운소설」 등이며, 몽골 왕에게 고려에 대한 억압을 누그러뜨려 줄 것을 간청하는 「진정표(陳情表)」가 특히 유명하다.

후인들은 대체로 이규보선생을 대문호로 추앙하지만, 한편으로는 최씨 무신정권의 ‘최비어천가’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그의 시의 내용이 현실과 너무 괴리감이 있고 백성들의 고통은 완전히 무시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문치(文治)를 하던 조선시대나 현대의 인권존중시각으로 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23세에 장원급제하고서도 무신정권집권자의 눈에 들지 못하여 등용되지 못하는 10년 동안, 역사에 남을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동명왕편」이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등과 같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무신정권에 저항하여 현실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이런 위대한 업적을 전할 수 없었을 터이다.

흔히 수필문학을 개화기에 서양문학을 배운 이들이 처음 도입한 것이라 하는데, 이는 큰 오해다. 신라의 원효대사나 최치원선생, 고려의 이규보선생 등의 뛰어난 수필작품을 모르고 하는 말일 성싶다. 이규보선생의 문장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호방했던 것처럼, 그의 문학적 대상도 국가대사부터 보잘것없는 고양이 같은 동물이나 쥐, 벼룩, 각종 나무나 가지, 오이, 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그는 한 작품에서 사람이 죽은 후 자손들이 막대한 재산을 낭비해가면서 장례와 제사에 공들이는 것은, ‘살아생전에 술 한 잔을 따라드리는 것’보다 못하다. 죽어 백골이 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기는 하지만 자손들이 일 년에 몇 차례씩 무덤에 찾아와 절을 한다 해서 죽은 자에게 무엇이 돌아가겠는가?’라 하는 대목에서는, 현대인인 나보다 훨씬 앞선 생사관(生死觀)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대한제국이 존속되었다면 나라꽃이 될 수도 있었을 소중한 오얏나무를 옥상 화분에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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