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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없는 칼, 포도(葡萄)

나뭇가지에 걸린 고전(25)

  • 입력 2021.05.17 15:07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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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포도 넝쿨이 힘차게 살아있는 듯 뻗어나가고, 짙은 자주색 포도알들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하였다. 진한 먹을 적셔 운필한 초서(草書)의 한 획처럼, 길고 능숙하게 포도 넝쿨을 그렸다. 포도 알들에 농묵과 담묵을 번갈아 채색하여 알알이 정성을 다하였고, 병들어 상한 포도 잎도 표현하는 등 더욱 사실적이어서 자연스런 표현기법들이 돋보였다. 한참 동안 포도병풍(墨葡萄屛) 앞에서 꼼짝도 못하였다. 몇 해가 지났지만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한 포도나무 그림이었다.

포도는 우리나라에서 귀중한 과일을 넘어 약으로까지 사랑을 받았으며, 시인묵객들이 무수한 시와 그림으로 남겼다. 특히 커다란 포도 넝쿨에 탐스런 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병풍은, 가문의 번창과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기에 무척 사랑을 받았다. 국보 제107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白磁 鐵畵葡萄文 壺)에서처럼, 검은색 안료로 그려 넣은 포도넝쿨 무늬는 조선후기 백자의 높은 회화성과 예술성을 여실이 보여준다. 천재이며 기인(奇人)이었던 뛰어난 문장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도 멋진 포도(葡萄) 시 한 수를 남겼다.

몽실한 살결 위에 포도 알로 점을 찍었나

凝脂肌面點葡萄(응지기면점포도)

비단 적삼 반쯤 벗고 가려운 곳 긁어도

半脫羅衫痒處搔(반탈나삼양처소)

외간 남자 눈길이 자주 가게 말지어다.

莫遣別人頻着眼(막견별인빈착안)

그것은 애간장 녹이는 날 없는 칼일지니

無鋒便是割腸刀(무봉변시할장도)

시인은 여인의 젖꼭지를 터질 듯한 검은 포도알로 은유(隱喩)하였다. 현대 감각으로도 아찔한 시다. 더구나 여인의 유방을 응지(凝脂), 즉 비개덩어리라 했다. 시인은 생육신의 한 분이다. 그는 40대 중반 환속 후 몇 년간의 결혼생활 외에는 평생 떠돌이 승려였다. 어느 여인이 그를 유혹했을까? 여인의 젖가슴을 보고 남자의 창자를 끊는 ‘날 없는 칼’이라 하고 있다.

포도는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 때 장건(張騫)이 흉노에서 귀국하면서 중국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포도가 들어왔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 포도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남겼다. 포도주는 고려 충렬왕 11년(1285)에 원나라의 원제(元帝)가 보내준 것이 처음이라 한다. 이후 우리가 직접 담근 포도주는 선비들이 마시는 고급술이었으며, 홍만선(洪萬選:1664∼1715)의 《산림경제》에 ‘익은 포도를 손으로 비벼 그 즙을 짜서 찹쌀에 밥ㆍ흰 누룩과 섞어 빚으면 저절로 술이 되고 맛 또한 훌륭하다. 머루도 된다.’라고 했으니 우리나라의 포도 역사도 결코 짧지 않다.

서양에서 포도의 역사는 오래되고 풍부하다. 포도는 세계에서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과일이라고 한다. 현재 포도는 유럽이 주산지이지만 원산지는 본래 아시아 서부, 카스피해 지역 코카사스 등이라 한다. 원산지에 인접한 지중해 연안의 고대 그리스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포도나무는 그곳 사람들의 문화에 깊이 녹아 있다.

그리스신화는 포도주를 통해 윤회사상 등 인도문화가 그리스에 전파된 것을 알려주고 있다. 포도주의 신(神)인 디오니소스(바쿠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디오니소스는 아시아 땅을 두루 거쳐 마침내 인도에서 몇 년간이나 주유(周遊)하였다.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어 돌아온 그는, 그리스에 자기 믿음을 널리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군주들은 새로운 종교가 불러일으킬 무질서를 꺼려 이 종교의 포교를 두려워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마침내 포도주 문화는 그리스의 한 문화로 자리 잡았고, 시인 밀턴은 포도주에 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현상을 ≪코무스≫에서 다음과 같이 그렸다.

보라색 포도에서,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저 달콤한 포도주를 처음 짜낸 디오니소스는, 튀르노스 해안의 바람이 부는 대로 키르케 섬으로 밀려갔다. 저 태양의 딸 키르케를 아시는지? 키르케가 권하는 마법의 잔을 입에 대는 자는, 두 발로 서 있지 못하고 엎어져 땅을 기는 돼지가 된다는데.

팔레스타인 지방 문화에도 포도와 포도주는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성경에는 150회 이상 포도나 포도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고 한다. 창세기(49:11-12)에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하는 기도에 포도나무가 등장한다. ‘야곱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매게 되고,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라 하고 있다. 포도나무는 귀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는 말은 귀한 포도나무가 너무 흔할 만큼 부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라 한다.

성경 속 ‘포도와 포도나무’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요한복음(15:1)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며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다. 최후의 만찬에서는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까지 했다. 풍성한 그늘을 만드는 포도 넝쿨의 무성한 잎은 ‘쉼과 평화’를 상징하며, 포도송이에 풍성한 포도알들은 ‘축복과 다산’을 의미하고, 물이 귀한 사막에서 물을 제공하는 포도와 포도주는 ‘고귀한 존재’를 의미한다고 한다. ‘노아의 방주’ 얘기에서도 비가 그친 후, 노아가 처음 재배한 과일이 포도다.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이 들었다.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형 ‘셈’과 동생 ‘아벳’에게 아버지 흉을 보았다. 노아는 자신의 추태를 떠벌린 함의 후손에게 저주를 내렸다(창세기9:18-27).

장마가 막 끝날 무렵 내 고향 안동 육사문학관으로 향했다. 이육사선생님의 생가인 단아한 한옥 육우당(六友堂)을 돌아 육사문학관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서자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저항 시인으로 활동했던 선생의 모습들을 담은 벽화가 오뉴월 서릿발처럼 다가왔다. 2층으로 올라가 선생의 흉상 앞에 단정히 서서 인사를 드렸다. 어려서부터 봐온 선생과 혈연이 가까운 내 지인(知人)들의 모습이 서려있었다. 갸름한 얼굴 윤곽, 오뚝한 콧날, 두껍지 않지만 도톰한 붉은 입술이 선생과 가까운 인척들의 얼굴 특징이다.

선생의 육필 원고들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빛바랜 원고지나 엽서들에 세로로 쓴 문장에는, 펜글씨들이 잘 익은 포도알처럼 주저리주저리 달려 있었다. 북카페<노랑나븨>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창 너머로 전설들이 서려 있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동남쪽으로 멀리 왕모산(王母山)이 보였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蒙塵)할 때, 모친인 명덕태후(明德太后)를 모시고 왔는데, 태후를 모셨던 자리에 사당을 짓고, 왕모산이라 불렀다. 왕모산 자락이 굽이치는 낙동강과 만나는 곳에 ‘칼선대’가 칼날처럼 솟아 있었다. 선생의 시 <절정>에서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고 한 시상(詩想)을 떠올릴 만하였다. 안동 사투리인 ‘재기다’라는 말을 두고 비평가들이 설왕설래를 하는데, 선생과 같이 예안에서 나고 자란 나는 ‘발로 세게 밟다’라고 해석한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동네 대항으로 손을 쓰지 않고 발로만 상대와 겨루는 ‘재기기 놀이’를 즐겨했다. 서쪽으로 <광야>의 시상을 낳았다는 ‘쌍봉 윷 판대’가 높았다.

청포도 시인으로도 알려진 이육사선생님은 나와 같은 안동 예안 출신이다. 선생과 동년배인 내 조부님께서는 ‘원록(源綠)씨는 북경이 아닌 남경 대학에 다녀서 공산주의자가 안 되어서 다행’이라 하셨다. 청포도는 ‘청매실’처럼 아직 덜 익었지만 알알이 꿈꾸며 익어가는 포도알이다. 올여름에도 육사문학관 앞에서 알알이 꿈꾸며 익어갈 청포도를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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