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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들면 타향도 고향!

  • 입력 2021.08.04 11:37
  • 기자명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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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남편 사후에도 카드를 보내오는 사람, 따뜻한 친구와 이웃의 사랑이 있는 곳, 고향

오래전 세상을 떠난 남편은 한국의 전통 가요를 좋아했다. 그 당시에는 유행가라 불렀던 노래들이다. 전통적 한국 남자들의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한창 연애를 하던 4년 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 ‘아폴로’나 ‘르네상스’ 등의 서양고전 음악실을 드나들었다. 내가 철부지 문학소녀 티를 벗지 못했던 60년대 중반 때였다. 그런데 막상 결혼해보니 우리의 음악 기호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의 뜨거운 열정은 당연히 ‘뽕짝’이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이나 <여고생>을 부를 때는 가슴속의 느낌들이 그대로 흘러나오는 모습이었다.

부부란 일심동체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결단을 내리고 남편의 흘러간 추억의 노래집을 한 페이지씩 외워갔다. 그리고 몇백 개의 노래를 같이 불렀다. 이제 남편이 떠난지 9년이 넘었지만 옛날에 같이 불렀던 유행가들은 뇌리에 생생하다. 게다가 해가 바뀌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연말이 되면 그 노래들은 더욱 마음에 젖어든다.

그 노래 안에는 온갖 철학이 들어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아니면 <인생은 나그네 길> 등등. 사랑을 하지 않았으면 결혼도 없었을 테고, 잃어버린 후의 눈물도 없었을 게 아닌가. 게다가 나의 어머니는 ‘아래로 흐르는 사랑’이라고 하는 자식들에 대한 짝사랑은 또 어떻게 하고! 노래 가사 중에는 한국 지리를 총망라한 것도 많다. 북으로는 <한 많은 두만강>으로 시작해 남단의 <목포의 눈물>까지 말이다.

그 옛날에 비행기 여행이라고는 상상 밖에 안되던 시절에 <홍콩 아가씨>나 <페르시아 왕자>를 외치는 것은 물론 <하와이 연정>을 통해 세계의 기행도 했었다. 실제로 갔을 때보다 얼마나 더 실감있는 감흥이었던가.

10년 동안 카드를 보내오는 이웃

이들 중에는 특히 고향의 노래가 많았다. 이북에서 태어난 피난민 대열에 끼어 부모님을 따라 남하한 우리는 벌써 옛날에 <타향살이>에 익숙해 있었다. ‘해방촌’과 ‘가호적’은 이미 우리의 성장 과정 중의 이정표들이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옮겨온 타향, 어른이 돼 선택한 제3의 고향, 미국을 되새겨보는 요즈음이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여간 마음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다.

LA에 옮겨와 같은 동네에서만 20여년을 살다보니 터주대감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고향이 된 것 같다. 옆집에서 친하게 지내던 옛 이웃 마가렛과 그 남편은 이사를 간 이후에도 성탄이 되면 긴 편지와 카드를 보낸다. 우리 세 아이들의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빠지면 으레 바람을 불어 넣어준 친절한 분들이다.

게다가 또 다른 이웃 ‘게일’은 얼마나 나의 이민생활을 도와주었는지... LA 도심지 한가운데에서 시커먼 콜탈과 석유가 지하에서 나오는 곳(Tar-Pit)을 가르쳐 준 것도 그녀이다. 그 기름샘 가운데서 발견되었다는 온갖 고대 동물들의 모형을 아이들은 박물관에서 신기하게 보곤 했다. 그녀는 동네의 유명한 음식점도 우리 부부에게 소개해 줘 같이 가곤 했다. 남편 회사가 망하게 돼 그녀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도 성탄이면 꼬박꼬박 카드를 보낸다. 어디 정을 주는 것이 옛 이웃뿐인가. 남편이 일하던 ‘그라나다 힐 병원’ 수술실에서 일하던 비서 바버라는 지난 9년간 빠짐없이 가족 사진으로 만든 카드를 보내온다. 옛 상관이 간지 10년이 가까워 오는 동안 그녀의 마음은 한치도 변함이 없다.

눈이 펄펄 많이 오는 것으로 유명한 뉴욕 주 버팔로 시도 나에게는 눈물 나도록 정겨운 곳이다. 그 도시에는 남편의 옛 대학 친구 가족이 산다. 그들은 친구가 이 세상에 있든 저 세상에 갔든 상관없이 나의 주소로 해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준다. 어리던 둘째 딸이 이제 벌써 아기를 낳게 되었다는 뉴스와 함께. 정말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된다. 따뜻한 친구들과 이웃의 사랑이 있는 한. 태평양 서부에 있는 이곳 LA에서 고향 한국의 정을 다시금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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