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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나무,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에 걸린 고전(28)

  • 입력 2021.08.04 12:41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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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교정의 플라타너스는 여름 내내 가지를 높고 길게 뻗어 쉼 없이 그늘을 늘여왔다. 넉넉한 그 그늘 아래, 아이들의 응원가 소리가 온 교정을 가득 채운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오늘은 가을 운동회 날, 만국기가 펄럭인다. 잡음 섞인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올림피아마치는 재 넘고 개울 건너온 아이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넓은 운동장에서 드높은 가을하늘을 향해 홀로 무성하게 솟은 플라타너스에게 물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란 하늘에 젖어 있다.’

운동장의 우측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그늘을 드리웠다. 많은 사람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친절하게도 나무 몸통에 붉은 페인트로 ‘둘레 2.8미터’라 써놓았다. 운동장 모퉁이에 교장 선생님 관사가 있지만, 플라타너스 그늘보다는 훨씬 작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뒷산이나 낙동강 백사장이야 물론 플라타너스보다 컸지만, 살아 있는 것으로는 플라타너스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전교생 8백여 명 중 백군인 4백여 명이 모두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응원을 펼쳤다. 청군은 운동장 좌측 3그루의 커다란 수양버드나무 아래서 응원을 펼쳤다.

당시 일제 강점기에 세운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대부분 플라타너스가 자라고 있었다. 이 나무는 생장이 빠르고 아무 곳이나 잘 자라며, 특히 잎이 넓어 큰 그늘을 만들었다. 꿈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외래어 이름이어서 더 이국적인 이 나무는, 넓은 운동장에서 아이들 꿈처럼 무럭무럭 잘도 자랐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플라타너스/김현승(金顯承;1913~1975), ≪문예≫, 1953. 6.

이 시는 고독한 삶의 행로를 함께 걸어갈 동반자에 대한 그리움을, 가로수인 플라타너스에서 느껴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적 자아는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을 이고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자기 삶의 동반자로 여기고 있다. 우리의 소박한 꿈은 다름 아닌 가로수 플라타너스 같은 ‘서로를 지켜주는 이웃’이라 노래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이 시를 처음 대했을 때 내 마음은, 어린 시절 교정의 운동장에 우뚝 솟아 있던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로 달려갔다. 

인간을 특정하는 말에는 여러 표현이 있다.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 생각하는 갈대, 이성적(理性的)인 동물,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등 다양하지만 나는 ‘꿈꾸는 인간’이라 말하고 싶다. 여기서의 꿈은 ‘희망(希望)’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을 살아 있어도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국어사전에 ‘꿈’이라는 명사에는 3가지 뜻이 있다. 첫째,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이다. 둘째,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고, 셋째로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이다. 사전에는 이 셋이 구분되어 있지만, 실제 인간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고대인들은 동서양 모두에서 꿈이란 ‘신의 계시’ 정도로 여겨왔다. 신이 힘이 지배하는 영역이니 규명 대상이 아니며, 꿈은 꿈꾸는 사람을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고 가정하였다. 예를 들어 왕좌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의 소망을 담은 꿈을 꾸어 그의 소망이 신의 계시임을 암시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찍이 장자(莊子)는 이에 반기를 들었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겼는데, 깨어보니 실은 장주(莊周)라는 사람이었다.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이 고사(古事)에서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음’을 뜻하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이 유래한다. 이리하여 장자는 꿈을 신의 세계에서 또 다른 인간의 세계로 가져왔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신(神)적인 것이 아니라 마성(魔性)적인 현상이라 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꿈도, 신성(神性)을 가진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마성적인 현상이라 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그의 명저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1900)을 통해 꿈이라는 하잘것없는 것을, 진지한 학문적 대상으로 삼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꿈의 특징을 크게 아래 3가지로 보았다. 꿈이 무엇을 보여주든지 간에 그 재료는 현실과 현실에서 전개되는 정신생활에서 유래한다. 꿈에서 현실의 경험이 재현되고 ‘기억된다.’는 것만은 여지없는 사실이다. 다만 꿈에서는 현실의 것을 그대로, 같은 의미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관심 밖의 것, 사소한 것이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변형된다.

이처럼 꿈은 현실에 그 바탕을 두지만, 꿈꾸는 이의 소망대로 바뀔 수도 있다. 따라서 국어사전에 있는 대로 희망도 되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헛된 기대라는 뜻도 성립한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무의식(이드)의 소망 충족을 위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무의식의 소망이 과도하게 성적(性的)이거나 일면 반사회적이면은 슈퍼에고(전의식/초자아)에 의해 검열된다고 했다. 슈퍼에고의 검열로 꿈은 왜곡되거나 압축되므로 꿈의 해석을 통해 환자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병의 원인을 찾을 수 있기에 꿈의 해석을 신중히 해야 하며, 꿈은 미래의 예시가 아니라 과거의 얘기고, 꿈의 의미는 옛일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플라타너스는 양버즘나무라고 하며 북미(北美)가 원산지다. 유럽에서 인도를 거쳐 동아시아에 널리 분포하는 버즘나무와 같은 종이다. 이 두 아종(亞種)의 교배종이 단풍버즘나무다. 석가(釋迦)가 보리수 밑에서 불법(佛法)을 설파했다면, 서양의학의 비조(鼻祖)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섬(島) 코스의 플라타너스 밑에서 의학을 가르쳤다. 제자들이 많지만 큰 집을 짓기 어려운 때라 큰 나무 밑이 교실 역할을 했다. 넓은 잎에 솟은 작은 털들이 공해를 정화하는 기능이 뛰어나 오래전부터 가로수로 많이 심었다. 그러나 현재는 뿌리가 약해 태풍에 잘 쓰러진다며 점차 다른 나무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나무뿌리가 맘대로 뻗어갈 수 없는 도로에 심은 탓이다. 물고기에 비유한다면 플라타너스는 고래와 같은 큰 종이니 넓은 곳에 키워야 한다. 좁은 곳에 촘촘히 심어놓고 나무뿌리 탓을 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내 모교 안동 월곡초등학교(1935년 개교) 터는 안동댐으로 1974년에 수장되었고, 지금은 학교를 십리 쯤 북쪽으로 이전했다. 한때 재학생들이 1천여 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유치원까지 전교생이 고작 24명이고 교직원이 24명이다. 그 플라타너스는 너무나 커서 고스란히 수장시켰다고 한다. 그 아래서 꿈꾸었던 수많은 아이의 추억과 꿈도 고스란히 간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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