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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사과’를 탄생시킨 ‘당뇨병’

세잔느 (Paul cezanne 1839-1906)

  • 입력 2021.08.04 15:10
  • 기자명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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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느 작 ‘사과’ 1877-78, 켄브리치, 휫츠 윌리엄 미술관
세잔느 작 ‘사과’ 1877-78, 켄브리치, 휫츠 윌리엄 미술관

[엠디저널]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과는 세 개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이브의 사과이고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이며, 세 번째는 화가 세잔느(Paul cezanne 1839-1906)의 사과이다.

화가 세잔느는 그의 평생을 통해 사과의 정물화를 그렸는데 그 그림이 그의 병적이나 운명과 무관하지 않아 그 사연을 알아보기로 한다.

세잔느는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고향에서 부르봉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의 동급생에는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가 있었다. 졸라는 후에 자연주의 문학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목로주점’을 저술하여 세계적인 대문호가 되었다.

그런데 졸라는 어려서 허약했고 지독한 근시여서 같은 반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세잔느가 나타나 졸라를 구해주곤 했다. 세잔느가 처음으로 못되게 구는 아이들을 혼내준 다음 날 졸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를 선물하곤 했다. 세잔느가 훗날 정물화의 소재로 자주 사과를 선택하여 그림으로 한 것은 이 ‘어린 시절의 사과’와 무관하지 않은데 그것은 그가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어려서부터 입버릇처럼 이야기해 왔으며 110점에 달하는 사과의 그림을 그려 그를 ‘사과의 화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사과 그림을 보면 그 형태가 구원형(球圓形)으로 충실감을 주는 것에서부터 충실했던 형태가 변하기 시작해서 분괴되는 것까지 여러 형태이며 구도와 색채에 있어서도 그 배분이 뛰어나며 자유로운 배열은 무엇인가를 전하는 것 같은 그림을 그렸다.

세잔느 작: ‘두개골이 있는 정물화’ 1895, 필라델피아, 링컨 대학교 번스 재단
세잔느 작: ‘두개골이 있는 정물화’ 1895, 필라델피아, 링컨 대학교 번스 재단

그가 1877년에 그린 ‘사과’를 보면 7개의 사과는 그 빛깔이 서로 달아 많은 사과 중에서 마음에 드는 충실한 모양의 사과만을 골아서 배열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짙은 그림자는 그 사과들의 충실감을 더해준다. 그러나 그가 그린 ‘두개골이 있는 정물화’(1895)라는 그림에서 보는 사과는 좀이 먹어 썩은 사과를 그렸으며 그 사과의 뒤에 두개골을 그린 것은 결국 두개골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일이 익으면 당도가 높아지고 이렇게 당도가 높은 과일은 자가 융해(自家融解)로 소멸되게 마련인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화실에 사과를 놓아두고 그것이 녹아서 소멸될 때까지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사과를 그리기 좋아해서 싱싱한 것에서 썩어가다 나중에는 소멸되는 과정을 관찰하며 그린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그의 지병인 당뇨병과 연관시켜 볼 때 전연 무관하지 않다. 당뇨병이란 몸 안에 당의 대사가 장애 되어 생산과 배설의 균형이 깨져 몸 안에 당이 많이 축적되어 오는 병이다. 그런데 마치 화가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당뇨병과 투병하며 나날을 지내면서 죽음을 예감한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세잔느 작: ‘자화상’1875-7, 뮌헨, 노이에 피나 코크
세잔느 작: ‘자화상’1875-7, 뮌헨, 노이에 피나 코크

세잔느는 화가가 될 때까지 무척이나 애로가 많았으며 또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모델로 같이 일하던 오르탄스 양과 동거하게 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완고한 그의 아버지는 모델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환경과 입장은 그가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데만 열중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입장과 생각을 나타내고 싶어서인지 여러 장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 대부분이 대머리가 절정에 달한 30대 후반에서 40대 전반에 거친 그림이다. 대머리인 자기를 그대로 그렸지만 7점만은 베레모나 중절모 등 여러 가지의 모자나 두건을 쓴 것을 그렸으며 대머리를 그릴 때도 그의 붓놀림에 특징이 보인다. 즉 녹청색이나 암회색 등의 색채를 사용하며 각별히 신경 쓴 것을 알 수 있는데 화가는 형태 분석에 탁월하였기에 자기의 대머리 표현에도 각별한 관심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36세 때인 1875년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두건을 두르고 있다. 세잔은 매사에 자신을 지녀 당당하여 고고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성격이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데다가 소심해서 다른 이의 시선을 언제나 신경 쓰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두건으로 자기의 대머리를 감추고 있는데 체격은 당당하고 얼굴에는 건강미가 넘치며 눈초리는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어 매서운 데가 있다. 즉 매우 건강미가 넘치는 자화상이다.

그러나 그가 41세인 1880년에 그린‘자화상’은 대머리를 완전히 노출 시켰으며 전의 자화상보다는 마른 얼굴로 볼이 홀쭉해지고 가냘픈 눈초리에 시선의 초점도 잘 맞지 않아 삶에 고달픔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어서 지병인 당뇨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30대의 중반에 두정부(頭頂部)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해 대머리가 되었으나 그 대머리의 주변의 머리털과 턱수염 및 구레나룻은 아주 풍부한 털로 덮인 소위 남성형 탈모증이었다. 즉 남성형 탈모증의 원인은 주로 남성 호르몬의 과잉한 상태에 의한 것으로 두발 특히 두정부의 모발은 남성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남자다운 사람일수록 남성형 탈모증이 많다는 것으로 강정의 상징이 되기도 하다는 것이다.

세잔느의 아버지는 자기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던지 오르탄스와의 결혼을 승낙했다. 결국 17년 만에 장남이 14세가 되던 해 즉 1886년에 그녀와 아들을 세잔느의 호적에 입적하게 되었으며 그해에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였다.

그러자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세잔느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좋아지고 몸이 편안해지자 그의 지병인 당뇨병은 심해지고 덩달아 신경통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몸이 불편해지자 그는 고향으로 가서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그의 확고한 형태의 구성과 중후하면서도 밝은 색채를 잘 조화시키는 그림은 젊은 신진 화가들의 절찬을 받았다. 1889년에는 파리의 세계 박람회에 그는 작품을 출품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화가로서 유명해졌다.

‘두개골의 피라미드’1901, 개인 소장
‘두개골의 피라미드’1901, 개인 소장

고향에서 그림에만 열중하는 동안 그의 몸과 마음은 점점 쇠퇴되어 갔다. 그러면서 그의 성격은 심술구짐과 관용, 대담과 겁먹기의 양극을 오고가며 교차되는 성격으로 변했으며 그의 당뇨병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자 그는 두개골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즉 종전에는 두개골을 썩어가는 사과와 같이 그리거나 아니면 두개골 하나를 단독으로 그리던 것이 마치 사과를 쌓아 올리고 그림을 그리듯이 두개골을 쌓아 올리고 ‘두개골의 피라미드’(1901)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사과 그림과 두개골 그림을 연계하여 볼 때 싱싱한 사과에서 시간이 경과되면 신선도가 떨어져 썩어가는 사과 그리고 사과의 뒤에는 두개골이 등장하다가 사과는 살아지고 두개골을 쌓아 올려 피라미드를 형성하는 등의 일련의 변화는 자기의 지병의 진행과 무관하지 않으며 특히 그의 자화상은 사과 그림과 마찬가지로 화가의 병의 진행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그림의 테마와 조형적 배려에서 인간의 죽음이 잠재하고 있어 그의 상징적 종교적인 의식이 곁들어 있으며 몸의 불편을 느끼는 만년의 자기를 여실히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에 돌아온 화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야외에 나가 고향 산천의 산과 들을 바라보며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생각하였다. 점점 몸이 불편해지자 동네 사람에게 부탁하여 마차를 세내어 타고 나가 그림을 그리고는 시간을 약속하여 대리로 오게 하였으며 주변의 집에 돈을 주고 화판과 화구를 맡기곤 했다.

1906년 8월에는 기관지염에 걸렸다. 그러나 그는 야외에 나가 그림을 계속 그렸다. 10월 15일에는 일상과 같이 뜰에 나가 그림을 그리다가 돌변하는 날씨에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급히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다가 화구를 멘 채로 쓰러져 비 속에서 실신하였다. 마침 지나던 사람에 발견되어 집으로 옮겨졌다. 

의사의 왕진으로 겨우 회복되는 듯 하자 그는 그림 물 깜을 주문하는 등 그림 그리기에 의욕을 보였으나 10월 22일에는 증상이 갑자기 악화되어 향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의사의 사망 진단서에 그의 사인은 폐렴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몸 안에는 당뇨병이라는 기초적인 병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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