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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이들의 나무, 배롱나무

  • 입력 2021.11.01 08:00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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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저녁 강바람에 나부껴 비단 같은 자주 빛 꽃송이들이 노을빛까지 곱게 물들인다. 꽃 귀한 시절인 삼복더위에도 들끓는 햇빛을 종일 도록 모아 곱게 꽃수를 놓았다. 나무껍질은 군더더기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매끈한 살색 나목(裸木)이다. 무더위에도 긴 꽃가지들을 꼿꼿이 세우고 작열(灼熱)하는 햇볕을 모으는 정열(情熱)이 넘쳐난다. 배롱나무 꽃말이 꿈, 행복, 웅변이었던가. 예부터 이 나무를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꿈을 위해 정진(精進)하는 선비의 나무로 여겨, 책 읽고 글 쓰는 곳 주변에 심어온 까닭을 절로 알 성싶다.

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 뜰 앞 배롱나무가 내 시선을 반나절 묶어두었다. 발길이 병산리(屛山里) 강변으로 접어들자 해는 벌써 서쪽 부용대(芙蓉臺) 위에 걸쳐있다. 바위들을 시루떡처럼 켜켜이 높이 쌓아놓은 것만 해도 장관인데, 병풍 같이 주름까지 잡아 펼쳐놓았다. 눈길을 백사장으로 옮긴다. 깊은 강물 속에도 반영(反影)으로 병풍바위가 펼쳐져 있다. 병산서원(屛山書院) 외삼문(外三門)을 바라보며 분홍색, 자색, 흰색 비단 수건들을 걸친 배롱나무 길을 걷는다. 자세히 보면 교잡이 되었는지 배롱나무마다 꽃 색깔들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이 아름다운 꽃나무들을 거느리고 한 누각(樓閣)이 달뜨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만대루(晩對樓)다. 신발을 벗고 누마루에 오른다. 멀리 북쪽으로 복례문(復禮門)이 보인다. 누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이루었는지 살피며 서원 안을 걷는다. 사당(祠堂) 앞에도, 입교당(立敎堂) 뜰에도 배롱나무들이 수놓은 비단수건을 흔들고 있다. 무척 더웠을 한낮의 햇볕을 고스란히 모아 정열의 꽃송이로 만들어 내는 배롱나무가, 극기복례를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달빛을 기다리는 만대루에 올라 낙조(落照)에 흐드러진 배롱나무 꽃들을 바라본다.

배롱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서원, 고택, 제사, 사찰 주변에 많이 자란다. 수백 년 된 배롱나무 노거수(老巨樹)들이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따뜻한 남부지방에 잘 자라는 배롱나무들을 요즘은 서울의 공원이나 아파트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지구온난화 덕분이라고나 할까. 배롱나무는 따뜻한 중국남부가 원산지라, 과거 서울지방에서는 겨울에 짚으로 나무를 감싸는 등 보호조치를 하지 않으면 겨울을 날 수 없었다. 고려무신정권 시절 선비들의 문집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이나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자미화(紫薇花)로 배롱나무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 말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꽃이 오래 핀다고 하여 백일홍(百日紅)나무로도 부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배기롱나무로 변했다가 지금처럼 배롱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파한집》에는 ‘이자미순우관동운(李紫薇純祐出鎭關東云), 세류영중신상장(細柳營中新上將), 자미화하구중서(紫薇花下舊中書)’라는 구절이 있다. ‘군대가 주둔하는 세류영(細柳營)으로 새로 부임한 상장군은, 자미 꽃 아래에서 거닐던 중서성의 관리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자미화는 간의대부나 한림학사를 역임한 호(號)가 자미인 이순우를 말한다. 또한 《파한집》에 따뜻한 경주출신 인사를 ‘자미(紫薇) 계림수옹(鷄林壽翁)’이라 소개하는 대목도 있다. 한 편 《보한집》에서는 두 번에 걸쳐 자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화출인문만수홍(花出人問萬樹紅)에서는 자미화의 색깔이 붉다는 것을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당시 배롱나무를 키우고 있었을 성싶다.

《파한집》과 《보한집》은 우리 수필문학에 아주 소중한 옛 문헌들이다. 《파한집》에서 이인로는 ‘문장은 당나라의 한유(韓愈)를 따르고, 시는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을 높였다.’고 했다. 이인로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송(宋)나라 문인들의 문집을 익혀 시를 짓는 요령을 얻었다고 했으니, 당 중국에서 자미(紫薇)라는 말은 3가지 뜻이 있다. 첫째 자미성(紫微星)은 황제의 별이라는 북극성을 의미한다. 둘째로 중서성(中書省)이 개칭된 자미성(紫薇省)으로 문서를 다루는 부서를 말한다. 그 나머지가 자미화(紫微花)이다. 수당(隨唐)시대에는 수도인 낙양에는 자미궁(紫薇宮)이 황제가 사는 궁이었고 황제의 성(城)을 자미성(紫薇城)이라 했다. 명청(明靑)시대에는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지며 자금성(紫金城)이라 하였다. 당나라 현종 현종이 아직 양귀비에 현혹되지 않아 성군 소리를 듣던 때에, 중서성 주변에 선비나 학문의 상징인 자미화를 많이 심은 후 중서성을 자미성으로 개칭했다 한다. 조선 세종 때 경복궁 옆에 배롱나무를 많이 심고 전각(殿閣)을 세워 자미당(紫薇堂)이라 했다. 이 무렵 성삼문(成三問)도 <난만자미(爛漫紫薇)>라는 배롱나무 시를 남겼다.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소쇄원, 식영정, 오죽헌 등 우리나라 동남부 지방에 자미나무를 많이 심었다. 사찰이나 문중의 제실, 산소 등에도 많이 심었고, 많은 선비들이 자미나무를 소재로 글을 지었다. 현재도 부산 부신진구 양정동 동래정씨 입향시조 사당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16호인 자미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수령이 무려 8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최초에 심은 나무의 뿌리에서 자란 새로운 나무로 추정하고 있다.

‘피어서 열흘 동안이나 붉은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늘 피기에 사랑받는 꽃도 있고, 끊임없이 늘 사랑 받는 사람도 있다. 배롱나무도 백일동안 핀다하지만, 실은 같은 꽃송이 안에서도 먼저 핀 꽃이 지면 새 꽃들이 끊임없이 새로 피어나니 늘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사람도 늘 사랑받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하여 늘 새로워져야 할 성싶다.

대학(大學)에 은(殷)나라를 창업한 탕(湯)임금은 세숫대야 바닥(반명盤銘)에 ‘진실로 매일 새로워지고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지라(湯之盤銘 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 새겨놓았다는 구절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며 대야에 비친 얼굴을 볼 때, 날마다 마음이 새로워지기를 다짐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예부터 선비는 선(善)을 향해 늘 새로워지려(명덕신민 지어지선 明德新民 止於至善) 애써왔다.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매일 새로워짐으로써 사랑받는 배롱나무를 선비의 나무로 여긴 것은, 배롱나무 꽃을 세심하게 관찰한 결과로 보인다. 오늘도 출근길에 아파트 울타리 앞에서 배롱나무가 보랏빛 손수건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다. 지금까지 평생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생업에 바쁜 민초 의사이지만, 퇴근 후에 배롱나무처럼 늘 새로운 마음으로 부지런히 읽고 써서 이 둔재(鈍才)를 깨우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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