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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실려온 기타의 선율

  • 입력 2021.11.04 16:33
  • 기자명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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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훼즈 궁전 전경
아랑훼즈 궁전 전경

[엠디저널] 가을의 정취는 바람에 실려온 피부감각으로도 다가온다.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한 베토벤의 인용구가 떠오른다. 물론 음악은 청각에 의존하는 예술이지만 상상력으로 소리를 시각화하기도 하고 공연장에서 듣는 실황은 악기의 울림통이 객석의 끝까지 전해져 그 진동을 느끼기도 한다. 음악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 시각적으로 인식할 때,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나 선율에만 들을 때 감상이 달라질 수 있다. 계절에 따라 곡의 감상의 달라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람에도 결이 있듯 선율의 음들이 내 귀를 스쳐가듯 다가오기도 한다.

아름다운 자연 속 아랑훼즈 궁전

스페인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의 아랑훼즈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은 특히나 도입부에서부터 눈을 감고 들으면 마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20세기 기타 협주곡 중 가장 유명한 아랑훼즈 협주곡은 1936년부터 3년간 지속된 스페인 내전을 피해 파리에 있는 동안 작곡을 시작하여 마드리드에 돌아와 곡을 완성하였다. 곡에 붙은 ‘아랑훼즈’는 그가 신혼여행 중 머물렀던 아랑훼즈 궁전(Royal Palace of Aranjuez)을 주제로 작곡했다.

아랑훼즈(Aranjuez)는 마드리드의 남쪽에 있는 18세기 부르봉 왕가의 여름궁전이 있는 곳인데 고원의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유명한 정원으로 알려진 곳으로 시대의 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아랑훼즈 주변의 문화경관지역은 2001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에 선정되기도 했다. 1938년 그가 방문했을 때 이 부근에 거주하는 집시들의 생활 환경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한다. 그는 이 협주곡을 아랑훼즈 궁전 정원의 목련의 향기, 새들의 노래소리, 샘솟는 분수를 포착하였다고 직접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곡은 1939년 작곡되었으며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으로 전체 3악장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중에게 익숙한 멜로디는 바로 2악장 아다지오(Adagio)이다. 바로 추억 속 TV프로그램인 KBS <토요명화>의 오프닝 음악 멜로디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려 1980년부터 2007년까지 27년간 토요일 저녁마다 영화 팬들을 TV 앞으로 모이게 했던 강력한 시그널이었다. 이 유명한 <토요명화>의 오프닝 곡의 원곡이 바로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이다. 방송에서는 원곡에 비해 베르너 뮐러 오케스트라(Werner Müller Orchestra)의 편곡 버전이 더 자주 등장했다.

아랑훼즈 궁전
아랑훼즈 궁전

클래식 기타와 오케스트라의 대화

협주곡은 대부분 독주자의 솔로 연주와 오케스트라 반주로 구성되는데, 독특하게도 ‘아랑훼즈 협주곡’의 2악장은 잉글리쉬 호른(오보에 계통에 속하는 악기) 솔로와 기타 솔로의 2중주 형태로 진행된다. 아마도 감성을 살리기 위해 지속적인 음을 낼 수 있는 관악기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작곡가 로드리고는 발렌시아 출신의 작곡가로 어린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인해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과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의 노력으로 발렌시아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시력을 거의 잃었기에 대부분의 작곡은 점자로 하였고 1927년 파리 사범고등음악원 (École Normale de Musique in Paris)에서 폴 뒤카(Paul Dukas) 사사로 작곡법을 배우고 모리스 엠마누엘과 안드레 피로로부터 음악학을 공부했다. 스페인 출신 음악가답게 기타를 주 전공으로 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 곡은 그가 38세 때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레히노 사인즈 데 라 마사(Regino Sainz de la Maza)에게 헌정한 곡이다. 2악장 작곡 당시 로드리고의 아내 빅토리아 카르미가 유산으로 힘들어하던 때에 자신의 눈이 되어주었던 아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절망감과 애틋한 기원의 마음이 표현되었다는 이야기가 이 곡의 해석과 함께 전해지기도 한다.

현악기와 목관악기, 금관악기(트럼펫, 호른)을 사용해 다양한 음색과 전체적으로 흐르는 선율이 아름다운 이 곡은 1940년 말에 완성되어, 그 해 11월 이 곡을 헌정한 기타리스트 사인즈의 연주로 바르셀로나에서 초연되었다. 그 후 1947년 사인즈와 스페인 국립 오케스트라(Orquesta Nacional de España)와 함께 음반 녹음을 했고 이후 라틴 그래미 명예의 전당(Latin Grammy Hall of Fame)에 올라 발표와 동시에 전설이 되었다.

로드리고의 작품 경향은 스페인의 국민주의적 소재에 기반을 둔 신고전주의에 속하며 선명한 선율과 화음에 현대적인 스타일의 불협화음도 가미되어 있다. 그의 스승이었던 폴 뒤카의 영향으로 낭만주의적 성향도 느낄 수 있는데, 기타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깨고 기타를 협주 가능한 악기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기타 이외의 다양한 악기로 연주되었고, 가사를 붙여 성악가들에 의해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호세 카레라스(José Carreras)가 부른 ‘사랑의 아랑훼즈(En Aranjuez con tu Amor)’가 있다. 로드리고는 이 곡을 ‘기타와 잉글리쉬 호른이 나누는 애수의 대화’라고 부른 것처럼 2악장의 솔로악기와 클래식 기타가 주고받는 선율이 매우 인상적이다.

아랑훼즈 궁전의 정원
아랑훼즈 궁전의 정원

사랑의 아랑훼즈

(En Aranjuez con tu Amor)

- 호세 카레라스의 앨범 수록 -

아랑훼즈,

사랑과 꿈의 장소

정원에서 놀고 있는

크리스탈 분수가

장미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곳

아랑훼즈,

바싹 마르고 색 바랜 잎사귀들이

이제 바람에 휩쓸려 나가고

그대와 내가 한때 시작한 로망스는

아무 이유 없이 기억 속으로 잊혀 졌네

아마도 그 사랑은 여명의 그늘에서

산들 바람에 혹은 꽃 속에서

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숨어 있었나보다

아랑훼즈, 내 사랑

그대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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