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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들어도 장미(薔薇)는 장미

  • 입력 2021.11.26 15:48
  • 수정 2021.11.26 15:51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의학박사, 수필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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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홀연히 한 가인(佳人)이 붉은 얼굴과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입고 간들간들 걸어와 말했다. “첩은 눈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유유자적하옵는데, 이름은 장미(薔薇)라고 하옵니다. 대왕님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행여 저를 받아주시겠사옵니까?”라고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제6권 신라 〈설총(薛聰)〉 편에 설총의 우설(寓說) 화왕계(花王戒)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처럼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장미꽃을 꽃 중에서 가장 화려한 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장미는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4군자에 들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사》에서 〈한림별곡〉의 일부 가사를 소개한 내용 중에 ‘황색 장미, 자색 장미’라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전기 강희안(姜希顔, 1418~1468)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는 가우(佳友) 화목(花木) 9품계 중에서 연국매죽(蓮菊梅竹)은 1품들이고, 장미는 사계화(四季花)란 이름으로 치자 등과 함께 5품으로 대우하고 있다. 한편 원산지인 동양보다는 오히려 장미를 전달받은 서양에서는, 여러 품종으로 개량하였고 영국에서는 국화로까지 선정되었으며 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 장미여, 너는 병들어 있다

거센 폭풍우 휘몰아칠 때 

캄캄한 밤중을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벌레란 놈이

진홍빛 어린 향락의 자리

너의 침대를 찾고야 말았다.

그 어둠이 속 비밀한 사랑이

너의 생명을 망치는구나.

O Rose thou art sick

The invisible worm

That flies in the night

in the howling storm

Has found out thy bed

Of crimson joy:

And his dark secret love

Does thy life destroy

병든 장미<The sick rose>/블레이크(William Blake)

≪세계의 명시/장끝별 역음, 민음사, 2012≫

시와 삽화를 동시에 추구한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1794년 완성한 동판화집≪ 경험의 노래≫에 수록하고 그린 시다. 이 시는 ‘티 없는 순진함’이 ‘현실’에 의해 상처받아 궤멸(潰滅)하고 만다는 약간 퇴폐(頹廢)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순진한 청춘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 벌레’에 의해 병든 미묘한 아이러니가 있어 우리를 전율(戰慄)하게 한다. ‘병든 장미’는 어둠 속에서 피고 지는 도시의 위험한 사랑, 위험한 성(性)을 빗댄 우설적(寓說的) 은유(隱喩)다. 시를 지배하는 암울한 분위기는 18세기 말의 시대정신인 산업혁명에 찢긴 영국사회, 특히 대도시의 쾌락과 황폐함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문단에도 ‘병든 장미’를 소재로 한 탁월한 단편소설작품이 있다. 이효석(李孝石)의 <장미 병들다(1938년)>이다. 이효석이 영문학도였으니 아마도 영국의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병든 장미>를 읽었을 것이고, 여기에서 영감을 받았을 성싶다. <장미 병들다>의 한 대목이다.

“육체의 일부에 돌연히 변조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다음날부터였으나, 첫 경험인 현보는 소변을 닫다가 변화에 하늘이 뒤집힌 듯이나 놀랐고, 첫째 그 생리적 고통은 견딜 수 없이 큰 것이었다. 몸에는 추잡한 병증이 생기며 용변할 때의 괴로움이란 살을 찢는 듯도 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병이 바로 이것인가보다 하고 즉시 깨우치기는 하였으나 부끄러운 마음에 대뜸은 병원에도 못가고 우선 매약점에 들렸다가 하는 수 없이 그 길로 의사를 찾았다.” 

일제치하에서 여주인공 남죽은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지만 서울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고향 관북으로 갈 여비를 구하는 동안 성병에 걸려, 남자주인공 현보와 부잣집 아들에게 성병을 옮기고 만다. 소설 속에서 이 병이 매독(梅毒)이라고 하지만, 잠자리 직후에 소변을 볼 때 증상이 있는 점으로 보아 매독이 아니고 임질(淋疾)일 가능이 높다. 매독의 초기 증상은 성기에 동전모양의 궤양이 생긴다. 소변볼 때 심한 고통을 느낀다면 임질이라 할 수 있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가시가 있다. 장미 가시와 연관된 사연이 깊은 시인이 있다. 독일의 릴케다. 자신의 거처인 미조트성(城)을 방문한 한 여인에게 주려고 손수 가꾼 장미 몇 송이를 꺾다가 가시에 찔렸다. 그 후 서서히 손이 마비되더니 팔까지 마비된 후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는 백혈병에 걸려 있어 면역이 약해져 있었기에, 장미가시에서 옮은 파상풍을 이겨낼 수 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장미는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의 관 앞 꽃다발 속에는 많은 장미꽃이 피어 있었다한다. 그의 비문 또한 낭만적이다. 릴케는 죽기 1년 전인 1925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유언장에 자신의 묘비를 위해 직접 지어 놓은 비문이다.

장미(Rose),

오, 순수한 모순, 그렇게

(oh reiner Widerspruch, Lust)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잠도 되지 않는 기쁨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 viel Lidem).

장미는 온대지방 식물이다. 여러 야생종이 북반구의 한대·아한대·온대·아열대에 분포하며 약 100종 이상 알려져 있다. 오늘날 장미라고 하면 이들 야생종의 자연잡종과 개량종을 말한다. 개량종은 주로 4계절 아름다운 꽃이 피는 중국종과 향기가 매혹적인 유럽 야생종 사이에 교잡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수만 종이 개발되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6~7,000종이며, 해마다 200종 이상의 새 품종이 개발되고 있다. 

장미는 햇빛을 좋아한다. 생육에 적당한 온도는 낮 온도는 24~27도이고, 밤 온도는 15~17도이다. 온도가 30도가 넘으면 꽃이 작아지고 꽃잎 수가 줄어들며 이파리의 색도 진해진다. 꽃은 일반적으로 흰색, 붉은색, 노란색, 분홍색 등의 색을 띠나, 품종에 따라 그 형태·모양·색이 매우 다양하다. 꽃의 피는 시기와 기간 역시 품종에 따라 차이가 크다.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품종에 따라 5월 중순경부터 9월경까지 꽃을 볼 수 있다. 마주나는 겹잎은 깃털모양이며 줄기에는 가시가 있다. 장미의 잎은 원래 5개가 기본이나 개량종은 잎이 훨씬 많다. 장미는 꽃을 보기 위한 품종, 꽃에서 향을 채취하기 위한 품종과 해당화처럼 열매를 얻기 위한 품종 들이 있다. 우리나라 자생 야생장미인 찔레도 꽃 크기와 색깔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개울가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버들가지가 피고 송사리들도 무리지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를 이어 곧 찔레나무도 초록 잎을 터뜨린다. 이때쯤이면 책보자기를 등이나 허리에 맨 아이들이 하굣길에 신작로보다는 개울둑길로 더 잘 다닌다. 찔레 덤불 속 연초록색 찔레 순을 따먹기 위해서다. 가시에 찔리면서도 덤불 속으로 손을 깊이 넣어 두어 뼘이나 자란 연한 찔레 순을 딴다. 껍질을 벗기고 아삭 한 입을 베물면 상큼한 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그래서 ‘덤불 속의 찔레 순’이란 부모의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철없는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 생겨났다. 내년 봄에는 가시에 찔리더라도 옛 추억을 되살려보려 덤불 속 찔레 순을 한 번 따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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