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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은 우리 것이 아니다.

  • 입력 2021.11.29 12:04
  • 기자명 전현수(송파 전현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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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우리는 몸과 마음이 우리 것이고 우리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그것들이 움직이는 원리, 다시 말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 우리의 소망은 그 과정에서 눈곱만큼도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무아입니다. 무아는 몸과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관찰을 통해 이 사실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상윳따 니까야》 <무아의 특징 경>에서 부처님이 첫 제자인 다섯 비구에게 이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경전을 살펴보겠습니다.

무아의 특징 경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아다. 만일 물질이 자아라면 이 물질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물질은 무아이기 때문에 물질은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 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느낌은… 인식은… 심리현상들은 알음알이는 무아다. 만일 알음알이가 자아라면 이 알음알이는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알음알이에 대해서 ‘나의 알음알이는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알음알이는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알음알이는 무아이기 때문에 알음알이는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알음알이에 대해서 ‘나의 알음알이는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알음알이는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인식은… 심리현상들은… 알음알이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비구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상세한 설명이 설해졌을때 다섯 비구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무상하고 무아니까 괴롭습니다. 나한테 고통만 주는 걸 내가 좋아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니까 그에 대한 탐욕이 없어지고, 탐욕이 없어지니까 해탈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아주 심플한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 심플한 가르침에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계합하면 아라한이 됩니다.

<무아의 특징 경>에서 우리는 우선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 깨쳐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므로 내 맘대로 안되고, 몸 자체의 변화법칙에 따라 변하므로 고통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관찰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계속 관찰하면 이를 알게 됩니다. 몸이 무상하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무상하므로, 곧 조건에 따라 바뀌므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내게 일어나며, 따라서 몸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몸이 내 것이 아니라고 알면 몸이 아파도 이전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몸의 고통으로 우울해지거나 하는 것이 줄어듭니다. 배가 고파도 짜증을 덜 내거나 안 내게 됩니다. 몸의 불편함에 따르는 우울이나 짜증 같은 부정적인 마음의 반응은 언젠가 시작되어 자동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몸이 무상하고 무아인 걸 알고 몸의 변화에 담담해지면 그에 따르는 마음의 반응도 점점 담담해집니다. 몸이 내 것이 아니니 몸의 변화에 덜 집착하게 되고, 집착을 덜 하게 되니 몸의 변화를 불편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아 억지로 해야 하지만 반복하면 마음에 길이 납니다.

이렇게 몸의 무상과 무아를 깨달으면 그 다음 단계로 몸의 변화에 대해 반응하는 마음의 무상과 무아를 깨닫기에 이르고, 더 나아가 마음이 어떤 경우에도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남에게 험담을 듣고 기분이 나빠졌다고 칩시다. 그때 ‘내가 지금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걸 느낄 수밖에 없다.’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에 대해 애착이 없는 상태가 되면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리대로 살아가면서 지혜가 많아지면 자기 속의 불건전한 것들이 해결되어 점점 더 진리에 가까워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런 과정을 단계적으로 밝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전의 (한계가 있지만) 도움이 되는 방법들을 마구 버리면 곤란합니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이제는 듣지 않을 거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붙지만 더 이상 그런 방법에 기대지 않을 거야.’라고 무턱대고 끊어버리면 안 됩니다. 기분을 좋게 하고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는 것도 하고 몸·마음 관찰 같은 수행도 함께 하면서 집착도 떨어지고 좀 덜 먹어도 관계없게 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탈 배도 없고 수영도 못하는데 물로 뛰어들면 아주 골치 아프겠지요. 그렇게 되면 자기도 괴롭고 주위 사람들도 괴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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