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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물든 가을 정원으로의 초대
  •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 승인 2021.11.3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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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Tignes

[엠디저널] 깊어지는 가을, 선선한 바람이 무더위에 짓눌린 감성을 깨우는 낭만의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일상과 같을지라도 특히 이 계절에는 내 주변 많은 것들이 우수에 찬 듯 보이기 마련이다. 우수라 함은 개인적 감정의 서술이겠으나 가을의 서정을 나누게 되는 절기임에는 틀림없다. 추석이 지난 뒤 어느덧 공기의 촉감이 달라짐을 느낀다. 10월 8일은 절기 상 ‘차가운 이슬’이 내리는 한로(寒露)이다. 계절도 변하니 심상의 변화는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실내악 작품들 중 가을은 아렌스키(Anton Arensky)의 계절이라 할 정도로 아렌스키의 피아노 3중주 1번은 서정적 선율을 자랑한다. 뚜렷한 멜로디보다는 피아노가 바이올린과 첼로의 대화를 충실히 뒷받침하며 진행된다. 피아노 3중주 1번 d단조 작품번호 32는 아렌스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으로 화성과 음색이 유연하고 우수 어린 서정적 선율이 전편에 흐른다.

클래식 음악에서 다양한 실내악 형태가 있지만 3중주란 세 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된 피아노 3중주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구성된 현악 3중주가 있다. 여러 악기의 편성이 가능하지만 보통 피아노 3중주라 하면 보통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편성이 대부분이고 3중주 편성은 고전 시대(Classical Period, 1750년경부터 1810년경)에 이르러 작품이 다양해졌다. 무엇보다 현악 3중주보다 피아노가 있어 두 성부의 역할을 하기에 화성이 충실하여 울림에도 변화를 주기에 풍성한 음색을 줄 수 있다.

알프스의 추억

필자가 2015년 프랑스의 알프스 지역 Tignes(띠뉴)에서 매년 여름 열리는 MusicAlp라는 음악 축제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들은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선생님의 아렌스키 연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럽 내 교통이 정비가 많았을 때라 영국에서 띠뉴까지 비행기, 기차, 버스를 타고 어렵게 도착했던 때라 더욱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국내에선 서울프링실내악축제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선생님과, 첼리스트 조영창, 피아니스트 김영호의 연주로 유니버설뮤직에서 실황 녹음을 2014년 발매한 바 있다.

MusicAlp Festival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첼리스트 조영창, 피아니스트 파스칼 드보용의 연주
작곡가 안톤 아렌스키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 1861-1906)는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러시아의 국민주의 작곡가이자 ‘왕벌의 비행’, ‘세헤라자드’로 유명한 림스키-코르사코프(N. Rimsky Korsakov, 1844-1908)의 제자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도 재직한 바 있으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 중에서도 ‘피아노 삼중주 1번’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3중주와 함께 오늘날까지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두 작품 모두 엘레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엘레지(Elegy)란 슬픔을 노래한 비가(悲歌)를 뜻한다. 원래 ‘죽은 이에 대한 애도의 시’를 뜻하는 음악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이후 그러한 내용을 가진 음악을 일컫기도 한다. 18세기부터 가곡이나 기악곡으로 작곡되어 악곡의 표제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친구인 카를 다비도프(Karl Davydov, 1838-1889)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심정이 담겨있다. 그는 생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원장을 지냈고 뛰어난 첼로 연주자였다. 차이코프스키는 그를 ‘첼리스트의 황제’라고도 칭했다. 이 곡의 3악장에 첼로가 두드러지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3중주와 마찬가지로 관현악에 가까우며, 특히 피아노 파트는 고난도의 연주력을 요구한다. 이에 아렌스키의 피아노 트리오 음반 제작은 항상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지(virtuosi)가 참여한다.

MusicAlp가 열린 프랑스 Tignes

추모곡은 선율로 쓰는 서사

피아노 3중주 1번은 아렌스키가 모스크바 음악원을 떠나기 1년 전인 1894년부터 작곡하기 시작하여 1899년 완성한 곡으로 그의 친구 카를 다비도프의 추모곡으로 헌정되었다. 이 곡의 첫 녹음은 왁스 실린더로 레코딩 되었으며 바이올린 교본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흐리말리, 첼리스트 브란두코프와 함께 아렌스키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이 곡에는 아렌스키의 서정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으며, 피아노 3중주 중 대작으로 평가받음과 동시에 구성에 있어 탄탄한 구조가 특징이다. 피아니스트였던 아렌스키답게 작품 곳곳에 피아노의 효과적 리듬 배치와 음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모두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특별히 3악장 Adagio는 “Elegia”라는 부제로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다. 슬픔을 노래하고 있지만 장송곡 같은 느낌을 주지는 않고, 중간 섹션에서 조바꿈을 하여 밝은 무드와 이후에는 마치 꿈같은 분위기로 이어진다.

1악장에서는 감정의 혼란이 두드러지고 피아노는 잠잠히 바이올린과 첼로의 대화를 뒷받침한다. 2악장은 ‘아렌스키의 왈츠’라고 불릴 정도로 그가 애정을 가진 경쾌한 왈츠가 등장한다. 피아노가 낮은 음에서 높은 음까지 건반 위를 누비고 바이올린과 첼로는 우아하게 대화를 나누며 현악기만의 우아함을 마음껏 드러낸다. 이후 피아노가 두 번째 주제를 선보이며 “Elegia”라는 부제가 붙은 3악장에서는 첼리스트의 연주가 두드러지며 극적인 피날레에서는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열정과 환희로 가득 차 있다.

아렌스키의 친구이자 러시아의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인 다비도프를 위한 헌정 곡이기에 다른 작곡가들의 트리오와 비교했을 때 첼로의 역할이 월등하게 두드러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3중주와 함께 러시아 로맨티시즘을 대표한다고 평가될 만큼 작품 전체에 짙은 서정미가 흐른다.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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