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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병을 자랑한 유언 작품 ‘현명의 우의상’ 화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 입력 2021.12.24 15:15
  • 기자명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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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티치아노 작: ‘자화상’(1562) 베를린, 국립 미술관
티치아노 작: ‘자화상’(1562) 베를린, 국립 미술관

15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자 베네치아는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미술에도 새로운 사조가 싹트기 시작했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이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영어로는 Titian(1490-1576)이었다. 그는 베네치아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의 예술을 지배하였던 서양미술의 거장으로 군림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티치아노는 약 80년간에 거친 그의 예술 활동을 통해 수많은 걸작을 창출하였는데, 현재 그가 그린 것이라고 인정되는 작품만도 약 640점이나 된다. 

그의 작품의 우수성에 대해 프랑스 로망파 시인이었던 고디에는 ‘그는 활력이 넘치는 예술가로 고뇌나 불안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힘차고 엄격성도 구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극찬하였다. 

티치아노는 병 같은 병은 알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순박하고 탐스러운 신체를 지녀 그의 화폭에는 언제나 사는 즐거움과 천진난만함이 넘치건 하였으며 또 티치아노는 적극적이고 확실한 인생관과 뛰어난 재능을 고루 그의 화폭에 담았고 균형 잡힌 배색과 유연한 붓놀림 그리고 힘찬 닷지로 독특한 그림의 세계를 창조하건 하였다.

종교화를 주로 그리던 티치아노는 초상화도 그리게 되었으며 그러자 유럽 각 나라의 대소 군주들은 앞을 다투어 그에게 자기의 초상화를 주문하여 그는 초상화 화가로도 유명해졌다. 그래서 티치아노는 일약 국제적 명성이 높아져 소위 ‘예술계 유명 인사’라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림의 의뢰인 명단은 16세기 유럽의 인명사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가 그린 이러한 군주들의 초상화와 그 가족들의 초상화는 명화로서 유럽의 각 미술관에서 오늘도 빛을 발하며 전시되고 있다.

티치아노 작: ‘자화상’(1567)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티치아노 작: ‘자화상’(1567)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이렇게 초상화의 달인이라 꼽히는 티치아노가 자기를 그린 자화상은 단 두 점뿐인데, 그중 하나는 1562년경에 그린 자화상으로 얼굴이 반 측면을 향하고 있으며, 회색 수염에 작업용 검은 모자를 쓰고 있고 목에는 황제 카를 5세가 1533년에 기사작위를 수여하면서 하사한 목걸이를 하고 있다. 화가는 관객이 아닌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다. 선과 색상은 말년의 특색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뚜렷한 윤곽선 없이 형태가 불명확한 형식이기는 하나 옷소매에 거칠게 칠해진 흰색이 빛의 효과를 충분히 내고 있다.

또 하나의 자화상은 1567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이번에는 옆면을 보고 있으며 옷과 같은 빛깔의 검은 모자를 쓰고 있다. 휜 수염에 윤곽선이 뚜렷한 얼굴로 눈에서는 여전히 힘이 느껴진다. 옷깃 밖으로 나온 흰 블라우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검은색으로 윤곽선이 거의 없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경지를 보여준다. 

티치아노가 화가로서 누린 영광은 대단했다. 그의 귀족으로서의 작위를 보면 황제로부터 받은 백작 그리고 기사작위가 있고, 로마의 명예 시민증도 받았다. 당대 최고의 군주들이 그를 극진이 대했으며 칭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예술가로 남아 죽는 날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이상의 두 자화상을 보면 티치아노가 죽음을 가까이하고서도 건강하여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화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말년의 작품 중에는 미술평론가들의 해석을 구구하게 하는 ‘현명(賢明)의 우의상(寓意像)’(1560)이라는 작품이 있다.

티치아노 작: ‘현명의 우의상(寓意像)’(1560년대 후반) 런던, 국립 미술관
티치아노 작: ‘현명의 우의상(寓意像)’(1560년대 후반) 런던, 국립 미술관

이 작품은 세 마리의 동물과 세 사람의 얼굴을 그린 삼두인수상(三頭人獸像)으로 그 해석은 만만치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의 상단에는 글이 쓰여 있는데 ‘과거의 경험에서 현재가 미래의 행동을 망치지 않도록 현재를 사료 깊게 행동하여야 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지금이라는 현재는 먼 옛날과 관련돼 지금에 이르렀으며 또 현재는 과거를 경험삼아 미래를 망치지 않도록 사려 깊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은 능히 알 수 있다.

즉 청년, 장년, 노년의 얼굴은 인생에 있어서 세 시기로 청년시대, 장년기 그리고 만년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생의 세 시기를 미래, 현재, 과거의 세상(相)과 결부시킨 것이다. 미래, 현재, 과거의 세상은 선견(先見), 지성(知性), 기억(記憶) 등의 세 심리적 능력에 의하여 보다 상세하게 ‘과거를 상기하여 과거에서 배우는 기억, 현재를 판단하여 현재를 행동하는 지성, 그리고 미래를 예상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선견’에 결부시킬 때 기억, 지성 선견의 덕(德)을 기초로 하는 사려의 미덕은 어김없이 시간의 관념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세 사람의 머리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려진 세 짐승의 머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게 된다. 파노프스키라는 미술평론가는 평하기를 이 그림은 이집트의 최고신의 하나인 세라피스를 헬레니즘 화한 것에서 유래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사자의 머리는 현재를 뜻하는 것으로 과거와 미래 사이에 위치하여 현재의 행동은 덕으로 강화되고 다듬어져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속하는 기억은 나이 먹음에 따라 마치 삼켜버리는 것과 같이 사라지는 것이니 과거는 늑대의 머리로 표현되었으며,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개의 이미지는 예리한 감각으로 사물을 예의 관찰하여 잘못된 것을 배제하고 언제나 즐거운 꿈과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주기 때문에 미래의 상징으로 푸리 하였다.

사실 늑대, 사자, 개의 머리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인 삼상(三相)의 우의상으로 보는 해석은 약 천년 가까이 사람들의 시계에서 사라졌던 것을 르네상스의 새로운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은 것은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1304-74)이며 이 삼두상을 사료 깊은 우의상으로 결부시키는 해석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티치아노가 그린 ‘현명의 우의상’에서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가의 의문이 생기게 된다. 나이 많이 들어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는 노화가로서는 고대의 시간-사료의 우의상이라는 옛 모티브를 통해 자기와 자기의 상속인 그리고 그 후세의 상속인이라는 앞으로의 미래의 상속인까지를 표현하고 싶은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이 작품은 티치아노 가의 법적 경제적 의미를 지닌 기념비적인 역할을 하였으면 하는 노화가의 생각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되는 근거로 우선 과거의 사람의 얼굴은 화가가 1567년경에 제작한 자기의 자화상의 모습과 같으며, 현재를 나타내는 사람의 얼굴은 티치아노가 사랑하는 아들(오라치오 베체리오)이며, 미래를 나타내는 사람의 얼굴은 화가가 그 장래를 기대하였던 조카(마르코 베체리오)의 얼굴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베체리오 가(家)의 3대에 거친 감동적인 인간기록이며 동시에 일종의 티치아노의 유서 대신에 그린 유화(遺畵)라는 것이 된다.

이렇듯 이 그림은 티치아노가 자기의 자화상을 이용하여 후세에 남기고 싶었던 금언과 유언을 그림으로 전했다는 것으로 더욱 감탄스럽다.

그의 나이는 확실치 않다. 그는 1477년생이라고 하나 주위에서는 1488에서 1490년생 이라는 주장이 있다. 티치아노는 노년기까지도 건강해 병이라고는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가 1576년 초여름에 베네치아에는 페스트가 발생되었는데 건강했던 티치아노도 전염병은 피할 길이 없었던지 페스트에 감염되어 48시간 만에 사망하였다.

페스트는 1576년에서 1578년 사이에 맹위를 떨치며 퍼져나가 베네치아 시민 약 5만 명 즉 인구의 약 1/6이 사망하는 대참변이 있었는데 시대의 거장 티치아노도 이 페스트에 회생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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