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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노려보기의 눈매와 눈길

  • 입력 2008.05.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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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떤 대상을 노려본다는 것은 화가 났다거나 무서움을 느꼈다거나 아니면 어떤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경우 어떤 대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응시하게 된다. 이렇게 사람이 상대를 노려보게 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일상생활과 관련되는 경우에 대해서만 기술하기로 한다.
우선 노려보기 때의 눈매와 눈길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눈의 모든 근육에 힘이 들어가 눈길의 움직임이 정지되고 고정되며 눈뜨기에 감정이 실리기 때문에 눈매는 사납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때 눈매와 눈길의 제일 먼저 눈에 띠는 특징은 위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상안검거근의 수축으로)는 것인데, 위 꺼풀이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화난 것과 비례됨을 의미하게 된다. 또 이맛살을 잡기(추미근의 수축) 때문에 눈썹머리(眉頭)가 밑을 향하여 세워지면서 눈매는 사나워져 사람을 쏘아보는 듯한 눈길을 하게 된다.
또 눈매와 눈길의 변화로 화가 난 정도를 알 수 있는데 만일 아래 눈꺼풀까지 당겨져 한일자가 되면 분노는 가일층 심한 것이 된다. 이렇듯 노려보는 눈길, 밑으로 곤두세워진 눈썹머리 그리고 당겨진 아래 눈꺼풀 등의 세 표정을 보면 분노는 심한 것임을 의미 한다. 만일 분노가 극에 달하면 눈을 무섭게 부릅뜨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눈알의 검은 동자까지 위로 올라가 위 눈꺼풀이 검은 동자의 아래 부분과 같은 높이에 위치하게 돼 눈에는 흰자위만 보이게 되여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공포를 느끼거나 놀랐을 때의 눈매와 눈길에도 특징적인 변화를 보는데, 이때는 전두근(前頭筋)이 먼저 수축하여 눈썹은 즉시 위로 올라가며 상안검거근이 수축해서 눈은 크게 떠진다. 공포와 놀라움이 다른 점은 고뇌라는 요소가 가미된다는 점이다. 즉 놀라움은 유쾌한 것도 불유쾌한 것도 아니지만 공포는 언제나 불쾌라는 요소가 가미 된다. 무엇인가가 두려워 불유쾌하면 전두근에 의해서 강하게 당겨진 눈썹은 추미근의 아래와 안쪽으로 당기는 힘에 의해서 비틀어지는 듯이 변형된다. 즉 눈썹은 슬플 때 모양으로 경사지거나 놀라울 때처럼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비틀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공포의 표정은 개인에 따라 차가 많으며 공포와 슬픔의 표정은 그 감정들이 약할수록 유사한 점은 많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를 느꼈을 때의 눈썹과 이마와 놀라움을 느꼈을 때의 눈썹과 이마의 표정에는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놀랐을 때는 전두근과 상안검거근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위 눈꺼풀이 당겨져 눈을 크게 뜨게 되며, 이마에 가로로 된 주름이 더 뚜렷이 잡힌다.
따라서 눈의 표정에 있어서 상안검거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이 근육의 수축정도에 따라 즉 그 긴장도가 높아지면 화냄, 성남, 놀램 등의 강력한 표정을 지우게 되며 그 강도에 비례해서 눈을 크게 뜨게 된다. 이러한 상안검거근의 긴장도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여 주는 것은 눈의 검은자위와 흰자위의 모양의 변화이다. 검은자위와 흰자위는 대조적인 빛깔이기 때문에 멀리서도 감지할 수 있어 이 상안검거근의 상태도 멀리서도 알 수 있게 된다. [1L]
이러한 상안검거근의 긴장도와 눈의 표정을 잘 표현한 그림으로서는 프랑스의 화가 크루베(Gustave Courbet 1819-77)가 자기의 자화상을 그린 그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그린 ‘자화상, 상처받은 사나이’(1841)를 보면 상처를 받은 화가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상처 받을 때의 놀라움 때문에 상안검거근은 최대로 수축되어 눈은 크게 뜰 수 있는 한계 까지 크게 떴다. 그래서 검은자위의 윗부분은 완전히 노출된 나머지 흰자위까지 노출 되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보면 우선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듯이 상대방을 응시하는 것은 자기의 거짓말이 탄로 나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와 경계심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사꾼이 이런 눈으로 설명을 한다면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며, 만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응시하는 경우라면 ‘눈길을 피하면 들킨다’라는 의식과 ‘눈길을 피하고 싶다’라는 무의식의 갈등이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눈길을 낳게 하는데 특히 여성이 이런 눈을 하며 ‘그런 일은 절대 없어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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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화가 뒤라(Albrecht Durer 1471-1528)가 그린 ‘히에로니무스 홀츠슈어의 초상’(1526)의 눈매와 눈길을 보기로 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당시 종교개혁으로 전 유럽이 일대 격변을 맞았을 때 개혁진영에 가담한 뉘른베르크 시의 공직자 이었는데 낡은 전통에 도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는 지도자답게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도 개의치 않고 뚫고 나갈 의지로 충만 된 모습이다. 화가 역시 루터파의 열렬한 지지자였기에 이 인물의 내면을 생생하게 표현 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이 남자는 지금 살아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추미근의 수축에 의해서 눈썹머리가 밑을 향하고 있으며 위 눈꺼풀도 당겨지는데도 불구하고 안구는 움직이지 않고 한곳을 노려보아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있어 마치 분노 때 보는 눈의 표정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입은 다물고 있는 정도이며 분노 시에 보는 표정은 아니다. 위험 있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이렇듯 분노의 표정의 일부를 표현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품의 주인공들의 눈매와 눈길 때문에 미술 평론가나 일반인들을 엄청나게 격분 시킨 그림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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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에드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83)가 그린 ‘올랭피아’(1863)라는 그림이 문제 되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나체 그림은 신화에 나오는 비너스 또는 육체미가 아름다운 모델이 주인공이었는데 올랭피아라는 모델은 창녀이다.
올랭피아는 신선미나 인간미도 없이 고릴라처럼 국부를 손가락으로 가리고 있으며 여자의 얼굴은 겉늙고, 손은 더러우며, 주름 잡힌 발에는 낡아빠진 슬리퍼를 걸치고 있고 침대보나 시트는 고양이가 묻힌 석탄재 자국으로 더럽다. 이렇게 누추한 꼴을 하고 있는 창녀의 눈길을 보면 거만하게 관객을 노려보고 있어 마치 “그래 나는 창녀다. 그게 도대체 뭐가 어쨌단 말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는 듯한 눈매와 눈길을 주고 있어 관객은 물론이고 지나던 사람들마저 돌을 집어 그녀의 얼굴에 던졌다고 한다. 만일 노려보지 않고 다른 나체의 모델들처럼 알몸이 된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었다면 관객들의 격분을 사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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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노려보기 때문에 문제가 된 그림은 18세기 스페인의 거장 고야 (Francisc de Goya 1746-1826)가 그린 ‘벌거벗은 마하(1800)’와 ‘옷을 입은 마하’(1805)라는 두 그림이다. 특히 ‘벌거벗은 마하’는 고야가 그린 유일한 누드화인데다가 모델이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추정되는 여인이 두 명인데 그 한 사람은 스페인 최고의 명문 귀족 부인이며 다른 한사람은 거리의 여인이라는 점에서 아직도 그 화제는 꼬리를 물고 있다.
두 그림 모두 다 그 눈매와 눈길이 심상치 않아 화제가 되었는데 특히 ‘벌거벗은 마하’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남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은 여인의 태도는 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마하의 눈길은 매우 날카롭고 결코 남이 시킨다고 해서 호락호락 움직일 여자 같지는 않아 보이는 제법 당돌한 여자같이 보인다. 그러나 남자 앞에서 알몸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기 때문인지 옷을 입은 마야 보다 옷을 벗은 마야의 노려보기의 정도가 더 심하여 사뭇 도발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을 통해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그림에 있어서도 눈매와 눈길의 표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