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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에 나타난 인간의 범죄본능(4)

예술과 범죄의 공존 카라바조

  • 입력 2022.04.12 10:54
  • 기자명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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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레오니 작: ‘카라바조의 초상’ 피렌체, 마루체니아나 도서관
레오니 작: ‘카라바조의 초상’ 피렌체, 마루체니아나 도서관

탁월한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예술가의 마음속에 사악한 범죄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이러한 상극되는 양면성을 지닌 화가가 있었다. 그는 밀라노 출신의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10)로서 그는 폭행, 명예회손, 성추행 그리고 살인 등의 갖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신성한 교회제단의 그림을 계속 그리는 이색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신성한 것을 신성하게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온갖 나쁜 짓과 범행을 다 하면서 신성한 것으로 잣대를 역전시켜 들어 맞춘다는 것은 즉 상반되는 것을 일치시킨다는 것은 감각과 재능이 엄청나게 뛰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한 것인데 카라바조는 이를 당연한 것처럼 해내건 한 것이다.

카라바조는 39년을 살았고, 화가로서의 경력은 16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도박과 술주정, 싸움과 투옥, 살인과 도피로 일관되는 파란만장하고 곡절이 많은 생애를 보냈다.

카라바조는 보름동안 일했으면 한 달은 떠돌아다녔다. 허리에는 칼을 차고 한 명의 시종을 따르게 했으며 항상 논쟁과 격투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폭력성과 예술성은 마치 마르스(전쟁의 신)와 미네르바(예술의 여신)를 합친 것으로 비유하건 했다. 그는 사치스러운 고급의상을 한 번 입으면 그것이 너덜너덜하게 해질 때까지 입고 다녔으며, 낡은 캔버스 천을 식탁보로 사용하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가난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은 1년에 평균 최소한 8백 에퀴를 벌었는데, 이는 1597년 당시 대학의 저명한 교수의 연봉의 약 4배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또 그는 신성한 교회의 종교화를 그리고 있던 시기에도 그의 스캔들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경비원 상해, 다른 이에 대한 명예훼손, 식당 종업원의 얼굴에 요리접시를 던진 일, 경찰에게 욕설, 불법 무기소지, 모녀 모욕, 동거 여인 문제로 공증인 상해, 여인숙 주인집에 투석 등 6년 동안에 15번이나 수사기록부에 올랐고, 여섯 차례나 감옥에 갔었지만 매번 어렵지 않게 풀려나곤 했는데 그것은 고위층의 후원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추기경과 같은 고위층 인사 외에도 여러 계층의 옹호자들이 있었는데, 교황청 우편배달부, 서적상인, 향수 판매원, 양복 재단사 등과도 친분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사람들과의 사귐에 있어서는 소탈한 면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606년 5월 28일 일요일에 그의 생애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돈내기 공 노리를 하며 놀다가 그가 돈을 잃게 되자 그것이 싸움으로 번져 그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상대를 사정없이 찔렀다. 그의 칼을 맞은 친구 라누초 토마소니(Ranuccio Tomassoni)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죽는 일이 벌어졌다. 즉 그는 살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법정에 회부되게 되었는데 확실히 그의 살인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일종의 돌발적인 사고의 성격이 농후하기 때문에 은사(恩赦)를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 심의가 길어지자 그는 이를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도망쳐 로마를 탈출하였다. 처음에는 가까운 나폴리에 머물다가 후에는 말타 섬으로 가는 등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고 평론가들은 자연주의자의 대변인이라 평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린 인물은 아프거나, 뚱뚱하고나, 수척하고나, 더럽거나, 추하거나 아니면 약한 사람들을 택하였기 때문에 그 인물들은 길가의 행인이나, 선술집의 술꾼들을 거리낌 없이 대상으로 하여 병들고 추한 것, 더러운 것, 결함이 있는 것 등 고전주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것들이지만 그는 작품의 좋은 소재로 삼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술꾼, 점쟁이, 사기꾼, 카드놀이꾼, 매춘부, 부량소년, 보헤미안 병사, 동성애자, 늙은 피부나 더러운 발바닥, 때가 낀 손톱이나 발가락, 엉덩이 등을 여과 없이 강조한 그림이 많다.

카라바조 작: ‘마테오의 순교’1599-1600,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파란체시 교회
카라바조 작: ‘마테오의 순교’1599-1600,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파란체시 교회

카라바조의 화려한 출세작인‘마테오의 순교’와 ‘마태오의 소명’(1599-1600)은 델 몬테 추기경의 후원으로 콘타렐리 예배실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인데 이 그림들로 인해 그는 하루아침에 유럽의 스타화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자화상을 특별히 따로 그리지는 않았으며 그의 초상화는 화가 레오니(Ottavio Leoni 1571-1610)가 그린 것 하나 뿐인데 아마도 이 그림이 카라바조의 생김새와 성격을 그대로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쉬 다라 올라 싸움을 잘 하는 다혈질적인 성격이 그 부리부리하고 빛을 토하는 듯 한 눈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커다란 코와 입 그리고 턱과 코의 수염은 일단 다라 오르며 는 자기도 모르게 그것에 몰두 해 버리는 집념성을 나타내고 있다.

카라바조 작: ‘병든 바쿠스’ 1593-94,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 작: ‘병든 바쿠스’ 1593-94,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그러나 카라바조는 자기그림의 주인공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어 자기의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해 그 당시의 자기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건 했다. 그의 초기 작품인‘병든 바쿠스’(1593-94)라는 그림에서 바쿠스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마치 병들어 누렇게 뜬 얼굴로 표현되었지만 그의 머리에는 젊음의 상징인 관을 씌워 그가 평상시에 그리도 그리던 불사(不死)의 관을 쓴 젊은 시인으로 변모시켰다.

카라바조 작: 그림 3의 부분 확대
카라바조 작: 그림 3의 부분 확대

그가 그린 ‘마테오의 순교’(1599-1600)라는 그림에서도 마테오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마테오는 바닥에 쓰러져있고 혈기 넘치는 망나니는 마테오의 오른팔을 움켜쥐고 칼을 들어대고 있다. 순교자의 손끝은 천사가 내려준 종려나무가지와 연결되어 있다. 벌서 치명의 일격을 받았는지 그의 복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의 두 팔을 벌린 십자가형의 동작은 최후의 의식행위를 행하는 듯싶다. 그런데 그 망나니의 얼굴을 확대해서 잘 관찰하면 그 얼굴은 틀림없이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다. 즉 자기를 죄인으로 표현해 실제 자기가 지운 죄를 속죄하는 진실성을 나티내려 한 듯이 보인다.

카라바조 작: ‘다윗’1609-10,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카라바조 작: ‘다윗’1609-10,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또 그가 그린 ‘다윗’(1909-1910)이라는 그림은 다윗이 거인 고리앗의 목을 쳐서 그 잘린 두부를 움켜쥐고 있는데 고리앗의 얼굴은 자기의 죄 많은 중년의 얼굴로 표현하였으며, 다윗은 자기의 젊었을 때의 얼굴을 그려 넣어 아무런 때가 묻지 않은 카라바조가 죄 많은 카라바조를 살해한 것으로 참회를 표현하기 위해 이중 자화상을 이용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그가 말타 섬에서 그린 ‘세례 요한의 참수’(1608)라는 그림에서도 참수 당하는 요한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표현해 즉 요한과 자기를 동일시하여 자기도 피의 세례 성사(聖事)를 받았으면 하는 자기의 간절성을 표현하였다.

이렇듯 그는 온갖 범죄를 저즐어 도망자 신세가 되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도 그림은 계속 그려 그의 화풍은 즉각적으로 큰 반응을 일으켜 카라바지즘(Caravagism)을 낳게 되었다. 카라바지즘이란 그가 로마에 머물렀던 외국인 화가들에도 영향을 끼쳤고 그들을 통해 전 유럽으로 확산된 카라바조의 독득한 화풍을 말하는 것이다. 카라바지즘의 열기는 그가 죽어서도 식지 않았다가 20여년이 지나서야 그 기운이 사라졌지만, 나폴리에서는 한 세기가 다 지나도록 그 여파가 남아 있어서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리베라, 라 투르 등과 같은 거장들의 화풍도 그의 핏줄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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