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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나무, 이상향(理想鄕)의 나무

  • 입력 2022.07.12 11:19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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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오래된 주춧돌만이 한적하게 키고 있던 절터 구석으로 별안간 눈길이 간다. 연분홍색 꽃들이 만개하여 근처가 모두 환하다. 속눈썹을 고추 세운 복사꽃의 화사한 웃음소리 따라 벌들이 벌들을 부르고, 나비들이 나비를 불러 모은다. 언덕 높은 곳 느티나무는 겨우 움이 텄을 뿐이고, 늘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굴참나무는 주걱 같은 연둣빛 작은 잎들을 겨우 내밀고 있다. 바스락바스락 낙엽을 밟으며 복사꽃 밑으로 발걸음을 옮겨가, 나도 몰래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귀신이 드나드는 문이 있는지 살펴본다.

이처럼 복사꽃이 화사하게 피면 새로운 한 세계가 열린 듯하니, 예부터 복사나무의 고향인 중국에서 영웅들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였고 무릉도원(武陵桃源) 설화가 만들어지는 등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했는지도 모른다. 서유기(西遊記)에서도 손오공(孫悟空)은 하늘에서 천도복숭아 과수원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겁 없이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고 벌을 받아 하계로 쫓겨났지만, 삼장법사(三藏法師)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일조를 했다.

복사나무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2천 년 전인 백제 온조왕(溫祚王)2년(서기15년)에 “겨울이 가까워 오는 10월인데도 벼락이 치고 복사나무와 자두 꽃이 피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인 1447년(세종 29)에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속에서 박팽년(朴彭年)과 거닐며 보았던 무릉도원의 경치를, 구술(口述)한대로 안견(安堅)이 그리도록 하여 「몽유동원도(夢遊桃園圖)」가 탄생하였다. 이 그림에서도 기암괴석이 높이 솟은 골짜기에 새로운 세상인 이상향(理想鄕)을 나타내는데 만발한 복사꽃이 한 몫 하고 있다.

복사나무는 북반구 온대지방 전체와 남반구에도 여러 야생종들이 자생하지만, 과일로서 처음 재배된 곳은 중국이라고 한다. 황하 상류 고원지대가 맛있고 굵은 복숭아 품종의 원산지여서인지, 그 옛날 중국에서 복숭아는 선과(仙果)로 하늘나라나 신선(神仙)들이 먹는 과일이었다. 이후 복사나무에 대한 수많은 전설이 만들어지고 민속이 얽혀 들어 병마(病魔)를 쫓아내는 선약(仙藥)의 나무가 되기도 했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서왕모(西王母)는 곤륜산에 사는 신선인데, 어느 날 한무제(漢武帝, 기원전156~70)를 만나게 된다. 서왕모는 3천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천도복숭아 일곱 개를 선물로 주었고 이를 서로 나눠 먹었다고 한다. 이는 복숭아를 신선이 먹는 불로장생의 과일로 받아들이게 된 시발점이라 한다.

이후 동진(東晋)의 도잠(陶潛, 도연명)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썼는데, 그 간추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진 태원연간(376~395)에 무릉(武陵, 지금의 후난성 타오위안 현)에 살던 어느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 속으로 잘못 들어갔다. 그 숲의 끝에 이르러 강물의 수원이 되는 깊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 동굴로 들어갔더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곳의 사람들은 전란(戰亂)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때 이후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왔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 사는) 사상에 기초하여 고대의 자연주의적 유토피아를 묘사한 것으로, 당대 전기소설의 원조가 되었다고 한다.

「몽유동원도(夢遊桃園圖)」는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린 산수화다. 세로 38.7㎝, 가로 106.5㎝ 크기이고,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447년 4월 20일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꿈속에서 도원(桃源)을 방문한 내용을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몽유동원도」를 그리게 하였다. 그 내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안평대군이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안견이 이 걸작(傑作)을 단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니, 거장 안견의 면모를 짐작하게 하고도 남는다. 안평대군과 더불어 찬문을 남긴 인물은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정인지(鄭麟趾), 김종서(金宗瑞),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이현로(李賢老), 서거정(徐居正), 성삼문(成三問), 김수온(金守溫), 만우(卍雨)스님 등으로 모두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당대의 인물들이다.

안견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詩文)은 현재 두 개의 두루마리로 나누어져 표구되어 있다. 첫 번째 두루마리에 박연(朴堧)의 시문까지, 두 번째 두루마리에 김종서의 찬시부터 최수(崔脩)의 찬시까지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순서는 발문의 내용으로 보아 일본에서 다시 표구할 때 변형시켜, 당시 일본에 널리 알려져 있던 신숙주의 찬문이 맨 앞에 배치되었다. 본래는 고득종(高得宗)의 찬문이 제일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시문은 각 인물의 친필로 쓴 것이어서 문학적 특징은 물론 서풍(書風)까지 볼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몽유도원도」는 시와 글씨도 함께 어우러져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어 세종시대 문화예술이 집대성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 그림은 회화 양식상 여러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야기의 전개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상적인 예와 달리 왼편 하단부로부터 오른편 상단부로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는 점이다. 또한 왼편의 자연스러운 토산(土山)인 현실세계와 오른편에 배치된 환상적인 암산(巖山)인 도원(桃園)의 세계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가장 큰 특색은 전체 경관이 몇 개로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즉 여러 개의 산 무더기들이 합쳐져 하나의 통일된 전경(全景)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특색은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와 그 영향을 받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산수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일본의 국보로도 지정되어 있다. 아래에 안평대군의 발문을 간추려본다.

늦은 봄날 꿈에서 박팽년과 숲속을 걷고 있었다. 산봉우리는 높고 골짜기는 깊었는데 수십 그루 복숭아나무가 있었고 숲 사이로 두 길이 있었다. 길을 잃을까봐 걱정하면서 걸어갔더니 거기에 한 야인(野人)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 길을 북쪽에 도원(桃園)이 있다한다. 말을 타고 들어가니 돌계단이 높이 솟아 있고 초목이 무성하고 개울이 구불구불해서 길을 잃기 쉬었다. 계속 들어가니 사방에 바위가 높이 솟아 있고 구름과 안개로 덮여져 있었으며 도림(桃林)은 안개와 아지랑이에 싸여 신비로웠다. -중략- 다만 옛날 말한 그 도원도 역시 이와 같았는지 모르겠다. 꿈을 꾼 지 삼 일 만에 그림이 완성됐다.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호)의 매죽헌(梅竹軒)에서 이 글을 쓴다.

복사나무는 못된 귀신을 쫓아내고 요사스러운 기운을 없애주는 주술적 징표이기도 한다. 중국 동해 한가운데에 산이 있고, 거기에 큰 복사나무가 3천 리에 걸쳐 뻗쳐 있었다고 한다. 가지가 뻗은 동북쪽의 작은 귀문(鬼門)을 통해 모든 귀신들이 출입했다. 복사나무는 자칫 못된 귀신의 소굴이 될 수 있기에 집 안에는 복사나무를 심지 않는 풍습이 생겨났다.

어릴 적 내 고향마을 서쪽 등인 백호등에도 오십여 그루의 복사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봄이면 멀리 복사꽃 언덕이 보이면 집이 가까워진 걸 알았다. 그때는 그 정경이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복사꽃이 지고 어서 복숭아가 익기만을 기다렸다. 모두 개복숭아들이었지만 잘 익으면 달콤새콤한 맛이 황도, 백도, 수밀도에 못지않게 맛있었다. 도연명이나 안평대군이 꿈꾸었던 것처럼 이상향이란 화려한 전각들이 즐비한 곳이 아니라, 닭 우는 소리가 담장을 넘는 소박하고 한적하게 이웃들과 걱정 없이 사는 화사한 복사꽃 피는 마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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