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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無窮花)와 무꾸게

  • 입력 2022.09.16 12:03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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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거목 은행나무가 지키는 양호문(養浩門)이 굳게 닫혀 있으니 담장 너머로 향교 안을 드려다 볼 수밖에 없다. 어릴 적에 보았던 120여년 된 나무 두 그루가 아직도 명륜당(明倫堂) 앞 중간 돌계단 뜰에 단정히 연분홍 꽃을 피우고 있다. 다섯 개의 연분홍 꽃잎들이 가운데에 암술과 수술의 모임인 붉은 단심을 받들고 있는 단심계다. 우리 고유 품종인 ‘안동무궁화’는, 화려하진 않아도 기품이 있어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안동 예안선비의 모습 그대로다.

안동무궁화
안동무궁화

우리 국화인 무궁화는 여름 꽃이다. 봄꽃들이 모두 진 뒤라 꽃 귀한 여름인 6월 말부터 피기 시작하여 10월까지 여름 내내 줄기차게 피고지기에 무궁화라 한다. 전 세계에는 약 200여 종의 무궁화가 있는데, 새벽에 피기 시작하여 오후 늦게 지기 시작하고 해가 떨어지면 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하루 반인 36시간 동안 지지 않는 무궁화가 있다. 바로 안동시 예안향교 명륜당 앞에 자라는 한국 고유품종 무궁화로 ‘안동무궁화’다. 조선 태종 11년(서기1411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이 향교에서 1919년 이동봉, 이용호, 김동택, 신응한 네 분의 선비들이, 고종의 국상(國喪)에 참여하고 서울에서 내려오며 3.1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뒤 애국심의 상징으로 20여년 된 무궁화 두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내력 덕분에 안동무궁화는 2004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세상의 다른 무궁화들이 다 져버리는 밤에 청초하게 홀로 펴 있는 독특한 품종이다. 꽃 모양도 다른 무궁화와 달리 종 모양이 아니고 평평한 홑꽃이다. 꽃잎이 작아 애기 무궁화라 부르기도 한다. 단출하고 여유 있게 펴 있으니 마치 잡념이나 쓸데없는 욕심이나 허세 없이 고고한 선비의 모습 같다고나 할까. 키는 1~2m정도 자라며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한국 고유종임이 밝혀졌다. 보통의 무궁화는 수명이 50여년을 넘지 못하는데, 이 안동무궁화는 120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영문으로 릴킴이라 명명하였으며 외국에 수출하며 품종 로열티도 받고 있다한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무궁화가 많이 자라는 나라로 불렀고,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를 근화향(槿花鄕)으로 불렀다는 기록들이 있다. 기원전인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 정리한 『산해경 山海經』에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자란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君子之國 有薰花草朝生暮死).”라는 기록이다. 여기서 군자국은 조선(朝鮮)이고 훈화초(薰華草)는 무궁화다.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 養花小錄』에도 “우리나라에는 단군(檀君)이 개국할 때 무궁화[木槿花]가 비로소 나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무궁화의 나라(槿域)’라 말하였으니, 무궁화는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봄을 장식하였음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효공왕 때 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써서 당나라에 보낸 국서(國書)에 “근화향(槿花鄕)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楛矢國, 발해)은 난폭함이 날로 더해간다.”고 했다. 『구당서 舊唐書』 신라전(新羅傳)에 서기737년(성덕왕 36)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신라를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고 했다.

고려시대에는 무궁화가 아주 널리 사랑 받았으나, 이(李)씨가 조선을 개국하며 오얏나무에 밀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선비들에게 꽃을 키우는 일은 마음을 닦고 덕을 기르는 한 방편이었다. 17세기 학자 박태보(朴泰輔)는 용도서(龍圖墅, 정자)를 짓고 구문원(龜文園)이라는 정원을 만들었다. 여기에 목련, 철쭉, 백일홍, 살구꽃, 벚나무, 배나무, 능금나무와 함께 무궁화(木槿)를 심어 가꾸었다는 기록도 있다.

무궁화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우리의 국화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구한말 개화기 선각자 윤치호(尹致昊)선생이 양악대 등과 함께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국화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도산 안창호(安昌浩)선생 등이 애국연설 때마다,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무궁화동산을 절규함에 따라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무궁화는 아욱목 아욱과 무궁화속 식물로 학명은 Hibiscus syriacus L.이고, 전 세계에 200여 종이 있다. 학명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무궁화의 원산지를 시리아로 보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도. 중국, 한국 지방이 원산지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무궁화의 세계적인 분포는 동아군(東亞群), 하와이군 등 7개 지역으로 나누고 있는데, 우리 무궁화는 동아군에 속한다. 중국에서는 무궁화를 목근(木槿), 순영(舜英), 순화(舜華), 훈화초(薰華草),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번리초(藩籬草) 등으로 불렀으나 무궁화로 쓰인 적은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한자로 무궁화(無窮花, 無宮花, 舞宮花) 등으로 썼으며, 근래에 와서는 무궁화(無窮花)로만 통일하여 쓰고 있다. 이 세 종류의 한자표기는 예로부터 써 오던 순 우리말 무궁화 이름을 한자음으로 표기하며, 뜻이 좋은 무궁화(無窮花)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무궁화라는 말도 원래의 이름이 아니고 무궁화와 유사한 음의 단어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1923년에 전라남도 완도지방에서는 노인들이 무궁화를 ‘무우게’라 부르고 있다하면서, 무궁화라는 꽃 이름은 ‘무우게’에서 변한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또한 수필가 이양하(李敭河)는 그의 작품에서, 호남지방 출신인 그의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무궁화를 많이 보아 왔으나, 그것이 무궁화라는 것은 전혀 몰랐고 ‘무강나무’로만 알아 왔음을 기록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무궁화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고유의 다른 이름이 있었으며, 이것이 한자 무궁화(無窮花)로 기록되어 온 것을 강력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약 2000년 전 기록인 일본의 『왜기 倭記』에서도 무궁화는 조선의 대표적 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일본에서는 무궁화를 ‘무쿠게(牟久計)’로 부른다고 한다. 무궁화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전해진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무쿠게’라는 한자가 오직 음만을 표시하고 별로 뜻이 없는 것으로 보아 더욱 그렇게 여겨진다.

여기에 내 어릴 적 기억을 하나 더 보태고자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내 시골집 뒷밭에는 배추, 토마토, 고추, 가지, 오이 같은 반찬거리를 가꾸었다. 그해 무척 가물어서 채소가 잘 되지 않은데다 진딧물까지 많이 끼었다. 이를 보신 내 조부님께서는 “무꾸게도 가까이 없는데 왜 진딧물이 끼었지?”라 하셨다. 무궁화는 큰 병이 없이 아무 곳에나 잘 자라나 진딧물이 잘 끼는 단점이 있다. ‘무꾸게’란 말을 몰랐던 내가 ‘무꾸게’가 뭐냐고 여쭈었더니 무궁화라 하셨다. 안동지방이라 학교에서 배우는 말과 집에서 하는 사투리가 다를 때가 많았다. 안동지방에서는 채소 ‘무’를 사투리로 ‘무꾸’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무수’라고도 한다. ‘무수’가 연음화하여 ‘무우’ 또는 ‘무’가 되었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보아 무궁화의 우리말 본래 이름은 ‘무꾸게’ 또는 ‘무수게’였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장마 뒤라 무척 덥지만 출근길에 한강변을 운전하며, 무궁화동산 근처에 이르면 차창유리를 내린다. 무궁화를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다. 푸른빛이 감도는 진한 분홍빛 무늬가 화려한 아사달계, 담심이 없는 순백의 배달계, 연분홍빛 담심계 등 여러 종류의 무궁화들이 어울려, 겹꽃과 홑꽃으로 만발하였다. 아직도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한다. 그런 주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궁화는 오늘도 다양한 변종으로 진화하며 햇볕이 뜨거울수록 더욱 힘차게 피고 있다. 우리나라도 세계사조의 다양한 변화를 수용하여 무궁화처럼 무궁하게 진화하며 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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