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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에 나타난 인간의 범죄본능(9)

따라 죽는 순사 딸려 묻히는 순장

  • 입력 2022.09.16 12:02
  • 기자명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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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과거 신분계급이 뚜렷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임금이나 남편 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 신하나 아내, 종 등이 뒤따라 순사(殉死)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또는 미덕으로 여겼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강제로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관습인 순장(殉葬) 즉 딸려 묻힘 이라는 관습이 있었다. 아무리 과거의 관습이라고는 하지만서도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처럼 억울한 죽음은 없을 것이고 참으로 어리석기 끝이 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진시왕 능에서 출토 된 충성을 맹서하는 병사
진시왕 능에서 출토 된 충성을 맹서하는 병사

고대 사회에서 부족장이나 왕이 죽었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매장하여, 죽어서도 생시와 같이 시중들고 생활하도록 하는 신앙적 의미에서 나온 풍습이었다. 종들을 함께 매장하거나, 신하나 처까지도 매장하는 일이 있었는데 매장하는 방법은 산 채로 묻거나 죽여서 매장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었으며, 죽은 자들의 생활을 위해 부장품으로 가재도구도 다수 묻었다.

순장이 의미하는 바는 내세 사상에 의한 것인데, 고대에는 인간이 죽었을 때 내세에도 그 신분과 그에 예속된 사람들 또한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믿었다. 따라서 지배자가 죽음을 맞았을 때 그 밑에 있던 사람들도 순장을 하는 방법을 택해 사후의 내세까지 그 권위가 이어지도록 하였다.

순장이 내세를 표현한다는 것, 자신의 권위가 다음 세상에도 이어진다는 것은 불가에서 믿는 내세 사상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불가에서는 인간이 내세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선을 베풀어야 하여, 악한 일을 많이 할 경우 내세에서는 가축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국가들의 순장 제도는 맥락을 달리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동물은 동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를 되도록 죽을 때까지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시왕 능에서 출토 된 병사들의 대열
진시왕 능에서 출토 된 병사들의 대열

이러한 순장이 역사적으로 가장 활발히 행해진 곳은 중국이다. 중국의 옛 은(殷)나라왕조(기원전 1600-1100년경) 때 순장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근거를 찾았다. 1928년에 후가장(侯家莊)에서 발견된 은나라시대의 유적으로 10기의 대형무덤과 1,000기에 가까운 소형무덤을 발견하였는데 대형무덤의 하나는 그 면적이 460평방미터이며 12미터 깊이에 매장되었던 것으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왕의 무덤으로 추측 되었다.

가운데에 있는 묘실(墓室)에 이르기 까지는 동서남북의 사방에 묘도(墓道)가 있으며 동과 서 그리고 북의 묘도에는 각각 하나식의 순사자의 것으로 추측되는 무덤이 있었으며, 남쪽의 묘도에서는 60구에 가까운 두개골이 없는 사람의 뼈들이 발견 되었는데 놀랍게도 한 결같이 좌우의 상지골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이것은 이 무덤의 공사가 끝난 다음 묘도를 매우면서 인부들을 결박하고는 목을 쳐 죽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묘실의 중앙에는 7 x 6 미터 넓이의 곽실(槨室)이 있었으며 왕의 것으로 보이는 관이 놓여 있었는데 그 밑에는 작은 구덩이 있고 그 속에는 무장병사와 개가 묻혀있었다. 또 곽실과 묘실의 네 귀퉁에도 병사와 개가 매장되어 있어 결국 이 무덤에서는 합계 73명분의 인골이 발견되었으며 무덤 주변에서 몸통의 뼈가 없는 두개골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남쪽 묘도에서 살해된 인부들의 두개골이었다.

이와 같은 광경의 무덤이 소둔(小屯)의 옛 궁전 터 바로 옆에서도 발견되었는데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탄 지휘관을 중심으로 전차대나 보병대가 목이 없는 채 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묻혔으며 그 수가 무려 500구를 넘었다. 이 수는 은나라가 외정(外征)에 동원 되었던 병력이 3천에서 5천명이라 하는데 여기에 묻힌 인골만 해도 그 병력의 6분의 1에 해당되는 수이다.

이와 같은 순장을 당시로서는 혈정의식(血淨儀式)이라 해서 사람의 피를 많이 흘리면 흘릴수록 깨끗해져 죽은 왕은 저승에서 편안한 삶을 할 수 있어 저승에서도 왕조는 번창을 기약할 수 있다는 신념과 병사는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당연히 저승에 가서도 왕조와 국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개가 묻힌 것은 개는 사람과 친숙한 동물이며 귀와 코가 예민해 영혼을 저승으로 편히 인도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왕의 무덤에는 반드시 개를 함께 매장하였다는 것이다.

진시왕 능에서 출토된 여인의 토용
진시왕 능에서 출토된 여인의 토용

또한 중국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따라 목숨을 버리는 일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여성이 남편이나 시부모, 또는 일족(一族)의 재산으로 취급되어 헌신적인 복종이 요구되는 도덕관념과 정절을 중시하여 재혼을 막으려는 것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유교도덕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은 중국에서는 이러한 여성의 묘비에 그러한 행위를 기리는 글을 새기거나 기념문(記念門), 사당 등을 지어 존경의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미망인이 관리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살하는 일도 많았다. 이러한 풍습은 미혼여성에게도 적용되어 약혼자가 죽으면 그 뒤를 따라 죽는 예도 있었으며, 죽은 약혼자와 혼례를 올려 평생을 시집에서 독신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또 미망인이 묘지에서 살거나, 죽은 남편과 같은 무덤이나 관(棺)에 매장하는 풍습도 순장과 같은 맥락에서 온 풍습이다.

즉 순장은 고대 국가에 있어서는 공통적으로 있었던 현상으로 세계 각 나라에서 순장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사회가 발전됨에 따라 순장을 통한 고대인들의 내세관에 의해 따라 죽고 딸려 묻힌다는 것이 어쩌면 막연하고 허무하다는 것이 알려짐에 따라 이들에게는 순장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고 순장을 대신해 즉 산 사람이나 사람을 죽여 묻는 대신에 토용(土俑)을 매장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

토용(土俑)이란 찰흙으로 빚어서 구워 만든 허수아비의 한 종류로 순장해야 할 사람 대신으로 무덤에 묻혔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토용은 중국 서안의 진시왕능(秦始王陵)에서 출토된 병마용(兵馬俑)으로 그 수나 귀모가 세계의 각처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크며 그 예술성에 있어서 높이 평가되어 세계8대 기적(奇蹟)으로 곱히고 있어 이제 그 예술성을 사진으로 나마 감상하기로 한다.

진시왕 능에서 출토 된 궁궐에 들어오는 악사들
진시왕 능에서 출토 된 궁궐에 들어오는 악사들

우리나라에서도 부여(위지 동이전)와 신라(삼국사기)에서 순장의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여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거느리던 노예 100여 명을 순장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신라에서는 지증왕 3년(502년)에 순장을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로 미루어 보아, 그 이전 시대에는 크고 작은 순장들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특히 국가에서 이의 금지령을 내렸다는 것으로 보아 민간 사회에서도 소규모로나마 순장이 행하여 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장의 대상 또한 주로 초기에는 노비와 전쟁포로 등이 대상이었으나 차츰 자신의 처나 첩 그리고 가족, 호위무사 등의 대상자들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이와 같은 순사, 순장의 허구성을 깨달게 됨에 따라 신라에서는 주로 토용으로 대치 되었으며 고구려에서는 벽화로 대체되었다.

태평양의 피지 섬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손가락을 자르는 풍속이 있었으며 인도양의 니코바르제도에서도 미망인이 손가락을 자르는 풍속이 있다. 일본에는 주군(主君)을 따라 가신(家臣)이 자살하는 일은 있지만, 남편을 따라 죽는 풍습은 없었다고 하며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사는 이외로 고대의 게르만족과 켈트족에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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