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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꽃보다 더 붉은 서리 맞은 단풍

  • 입력 2022.11.22 12:26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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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하여 앞산을 오르다가, 석양에 붉게 타는 단풍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가을바람이 온 산을 울긋불긋 물들여 놓았다. 단풍이 든 가을 산을 멀리서 보면 인상파의 점묘화처럼 형형색색 점들을 찍어놓았고, 가까이서 보면 콜라주기법으로 각기 다른 단풍을 크게 오려붙여 놓았다. 옛 시인은 “서리 맞은 단풍이 이월 꽃보다 붉다.”고 하였다. 단풍이 드는 나무는 아주 많지만 그 중의 으뜸은 당연히 단풍나무다.

단풍나무만큼 시인들의 사랑을 받은 나무도 드물 성싶다. 이해인 시인은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라고 노래했다. 그러면 가을 단풍은 어찌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을까? 아마도 가을이라는 계절과 함께 화려하게 변하는 그 색깔 때문이리라. 봄부터 식물들이 자라나 여름에 절정을 이루다가, 가을이면 성장을 멈추고 낙엽이 지며 동면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가을이면 식물들은 그간 애쓴 결과 결실을 맺게 되고, 사람들에게는 이를 수확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때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낙엽 한 잎이 머리 위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쓸쓸한 가슴을 달래려 옷깃을 여미고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한 잎의 낙엽이라도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렇게 멈추어서 아쉽고, 떨어져서 서운하고, 결실을 확인하고 반성하는 축소지향적인 계절이 가을이다. 그런데 이런 계절에 오히려 화려하게 단장하고 확장하는 단풍의 역설에 사람들은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노년들에게는 단풍처럼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계기를 주기도 한다. 더구나 시인라면 화려한 단풍들이 넘어가는 석양빛에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당(唐)나라 두목(杜牧)은 이 광경을 이렇게 읊었다.

저 멀리 차가운 산 비탈길 올랐더니(遠上寒山石徑斜 원상한산석경사)

흰 구름 피어오른 곳에 인가 드문 보이어라(白雲深處有人家 백운심처유인가).

가던 수레 멈추게 한 건 아름다운 황혼 단풍(停車坐愛楓林晩, 정거좌애풍림만)

서리 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불어라(霜葉紅於二月花 상엽홍어이월화).

산행(山行)/두목(杜牧, 803년~852년), 『서리 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붉어라/유병례』

이 시의 마지막 행을 1995년 가을 한국을 방문했던 장쩌민(江澤民) 중국주석이 인용하여 언론들이 다투어 보도한 적이 있다. 산하를 곱게 물들인 우리나라의 가을 단풍을 보고 무척 인상적이었던지, 중국도 단풍이 아름다운 나라라며 “서리 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붉어라.”라고 읊조렸다. 그 후 이 한시가 한국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

동서양의 이름 있는 시인들은 가을단풍에 대한 많은 시를 남겼다. 조선 세종 때 안평대군은 지금의 종로구 수성동 사저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정원을 조성하고, 집현전 학사 등 명사들을 초청하여 비해당사십팔영시(匪懈堂四十八詠詩)를 짓게 하였다. 여기에 성삼문(成三問)은 「햇빛에 반사된 단풍(映日丹楓, 영일단풍)」이라는 멋진 시를 남겼다.

무지한 채로 속절없이 늙어가니(無知空老大, 영일공노대)

빠르기만 한 세월 어이 하리(歲月奈駸駸, 세월나침침)

단풍나무 아래 이런 말 꺼낼 적에(寄言丹楓樹, 기언단풍수)

송옥의 슬픈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寧無宋玉心, 영무송옥심)

여기서 송옥(宋玉) 마음은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참언(讒言)으로 충성(忠誠)을 의심받아 쫓겨나게 된 심정을 슬퍼하여 초사(楚辭)를 지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굴원의 문인(門人)인 송옥은 가을에 그의 서글픈 심정을 실어 「구변(九辯)」이라는 역사에 남을 명문을 남겼다. “가을의 기운이 느껴지니 슬프도다(悲哉秋之爲氣也 비재추지위기야)​”로 시작하여 “고생을 참으며 지냈어도 이룬 것이 없어라(蹇淹留而無成 건엄류이무성)​”로 끝나는 이 부(賦)에는, 굴원의 초사와 같은 정열적인 자기주장은 없고 다만 비애의 서정만 있을 뿐이다.

단풍나무는 낙엽이 지는 큰 키 마무로 원산지는 동아시아로 한국, 중국, 일본에 많이 분포한다. 키가 15m이상까지 자라고 마주나는 잎은 5~7갈래로 갈라졌으며, 갈라진 조각의 끝은 뾰족하다. 5월에 피는 꽃은 볼품이 없어 잘 알아보지 못한다. 꽃잎이 암꽃과 수꽃 모두 없고 꽃받침잎 5장이 꽃잎처럼 보인다. 열매는 잠자리날개모양으로 가을바람이 불면 날개처럼 날아간다. 목재는 색상도 다양하고 조직이 치밀하여 가구재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단풍나무의 학명은 Acer palmatum이다. Acer는 ‘날카로운(sharp)’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왔다. 단풍나무 목재가 단단하여 창을 만들었고, 단풍나무의 갈라진 잎이 뾰족뾰족하고 끝이 날카롭다는 데서 유래했다한다. 종명 'palmatum'은 손바닥 모양을 의미한다. 단풍잎이 한 색깔로만 물들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가을이 되면 넓은 나뭇잎은 햇빛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다른 색소로 변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들은 각각 다른 파장의 빛을 흡수한다. 오렌지색이나 붉은색은 카로티노이드(carotinoid), 노란색은 크산토필(xanthophyll), 짙은 붉은색과 보라색 등은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라고 한다.

단풍나무의 원산지는 동북아이지만, 단풍나무 종류는 열대, 온대, 한대 지방에 널리 분포하며,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단풍나무 종류는 15여종이라 한다. 단풍나무, 당단풍나무, 고로쇠나무, 신나무, 복자기나무 등이 중요한 자생단풍나무들이다. 이밖에도 수입종인 은단풍, 캐나다단풍, 네군도단풍, 수양단풍 등 여러 종류의 단풍나무들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하고 가을에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유난히 단풍이 곱게 드는 지역이다. 그러나 가을에 비가 많이 오는 해는 단풍이 곱게 들지 않는다. 겨울에 그다지 춥지 않고 비가 많은 지중해성기후 지방은 같은 나무라도 단풍이 곱지 않다. 젊어서 미국에서 공부할 때 에팔레치아 산맥 근처인 동부지역에 살았다. 주말이면 ‘블루리지파크 웨이’를 따라 자주 드라이브를 갔다. 마르린 먼로 주연의 멋진 서부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의 무대였던 세난도하 강, ‘루레이 캐빈’, 미국의 경주라 할 수 있는 윌리암스버그 등의 가을 경치도 단풍이 있어 더욱 운치 있었다. 어느 가을 날 그곳에서 캐나다 국경인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여행하며 위도에 따라 아름답게 펼쳐지는 단풍을 볼 기회가 있었다. 아내는 지금도 평생 볼 단풍을 그때 다 보았다고도 하고, 그때 본 달이 평생 본 달 중에서 제일 크다고도 한다.

봄꽃과 반대로 단풍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다. 뉴스에 시월 초인 요즘 풍악산(楓嶽山)에서 시작한 단풍이 백두대간을 타고 설악산을 거쳐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한다. 도심을 떠나 산 밑으로 이사 온지 다섯 해가 되었다. 절터 옆 산비탈 밭 뙤기에 심은 복자기 나무들이, 해마다 가을이면 노랗고 빨간 단풍으로 창밖 풍경을 장식하고 있다. 올해도 바람 불면 수많은 복자기 열매들이 잠자리날개처럼 하늘 높이 날리는 광경을 보고 싶다. 발갛게 달아오른 아기 손 같은 고운 단풍을 보며 있지도 않은 손자들 손잡고 영원히 시월에 머물러 살고 싶지만, 세월은 나를 위해 머물지 않을 터이다. 단풍처럼 아름다운 것은 단명(短命)하다고 했던가. 뭔가 아쉽고 서운한 계절에 단풍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반성할 기회를 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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