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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미소의 만능적 다양성과 그 이행성

  • 입력 2008.10.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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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이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미소를 지을 상태가 아닌데도 미소를 짓는 경우도 있어 미소에는 어떤 정신적인 작용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소는 소리 내지 않고 가볍게 웃는 단순한 몸짓언어이지만 심리적, 정신적 원인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기도 한다. 즉 예의, 찬동, 호감, 애정, 이해, 경의, 공감 등이 내포되는가 하면 반대로 불신, 회의, 놀람, 조롱, 경멸, 빈정댐, 수줍음 등등의 의미가 내포되기도 하여 미소의 진의 파악에는 상당한 혼선이 초래될 수도 있다. 이렇듯 화려한 얼굴의 이면에서 진정한 인간성의 감춰진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미소의 특징이기도 하다.

미소는 상징체계의 기본 요소 중 하나
미소는 말로서 그 정체를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흔히는 각종 수식어들이 뒤따르면서 그 정체를 설명하려 애를 쓰게 된다. 그러나 미소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만, 따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붙잡을 겨를도 주지 않고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기에 가만히 놓고 면밀히 관찰하고 검토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미소를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어 미소는 보는 이의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때로는 미소자의 뜻과는 당치도 않는 해석으로 불행을 초래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생명마저 잃는 경우도 있다.
미소를 단지 인간의 본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자동현상으로 볼 수만은 없다. 물에 접하면 저절로 피어나는 꽃처럼 적당한 때가 되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미소는 의례의 표현이면서 육체적 심리적 상징체계에 속한다. 미소에 함축된 상징적 의미는 매순간 끊임없이 관계를 맺게 되는 다른 이의 존재에 의해서 변화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의미작용은 단지 표정으로만이 아니라 다른 신체적인 표현들, 예를들어 말이나 몸짓 그리고 시선의 방향 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정확한 문화적 사회적 조건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미소는 우리가 지니는 상징체계의 기본 요소의 하나인 것이다.
표정의 중립지대, 무표정
사람의 감정표현은 편의상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의 4가지 큰 틀로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이 희, 노, 애, 락의 각 표정을 4개의 극(極)으로 본다면 이러한 표정이 전연 없는 극 즉 무표정이라는 극이 4개의 표정과는 등거리(等距離)내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을 Mastumoto(1996)는 그림으로 표현하였다.(그림 1. 참조)
[1L]
그림에서 무표정이란 감정을 표출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표현으로서의 무표정으로 이른바 표정표출의 거부이다. 그러나 수면 시에 보는 무표정은 사람의 의사와는 관계되지 않는 순수한 무표정이며, 더 참된 무표정은 죽은 이의 얼굴에서 보는 무표정일 것이다.
여기에 설명을 덧붙인다면 각 표정들은 각기의 명확한 경계는 없어 연계성을 지울 수가 있으나 각기의 방향성은 뚜렷하기 때문에 표정간의 어떤 극에서 다른 극으로의 이행은 무표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의 개념을 예를들어 보면 즐겁게 웃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낸다거나, 아니면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다. 즉 감정의 변화에 의한 급격한 표정의 변화라 할지라도 그 과정을 정밀하게 추구하여 보면 무표정이라는 중립지대(neutral zone)를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희, 노, 애, 락이라는 감정에 의한 표정의 분극화(分極化)는 서로 연계될 수 있으나 중립지대로 보는 무표정을 거쳐서 감정의 표정은 이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표정이라는 중립지대(N라는)의 개념을 미소로 대치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기분이 좋을 때는 실제로 미소를 짓지 않더라도 입 가장자리가 다소 실룩해지는 것 같은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즉 무표정의 중립 위치를 미소로 대치하면 미소의 다양성과 그 이행성이 저절로 풀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미소 가운데는 기쁨(희), 분노(노), 애석함(애). 행복(락)의 4개의 분극화된 표정이 언제든지 들어가 미소 속에 포함될 수 있으며, 반대로 미소가 4개의 분극화된 표정의 어느 하나로도 이행될 수 있으며 또 이렇게 이행되었던 미소는 좌우의 분극과 연계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다시 중립지대로 되돌아왔다가 4개의 분극화 된 표정으로 이행될 수도 있다는 것을 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소의 다양성과 이행성을 ‘미소표정의 만능성’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그림 2. 참조)
[2L]
따라서 미소가 기쁨의 분극에 이르면 기쁨의 무한한 미소를 지우다가도 행복의 분극인 락과 연계하여 호감, 공감, 이해, 찬동의 등을 내포한 미소로 쉬 바뀔 수 있으며, 미소가 행복의 분극인 락에 이르면 행복의 무한한 미소를 지우다가도 기쁨의 분극인 희와 연계하여 애정, 경의, 예의바름 등이 내포된 미소로 쉬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또 미소가 분노의 분극인 노에 이르면 분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노여움의 미소를 지우다가도 애석함의 분극인 애와 연계하여 놀람, 조롱, 경멸, 빈정댐 등이 내포된 미소로 쉬 바뀔 수 있으며, 또 미소가 애석함의 분극인 애에 이르면 애처로운 마음에서 우러나는 애석함의 미소를 지우다가도 분노의 분극인 노와 연계하여 불신, 수줍음, 회의 등이 내포된 미소로 쉬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림 속에 무표정과 희로애락
앞에 도표들은 미소의 무궁한 다양성과 이행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이제 중립지대로 볼 수 있는 무표정과 이러한 중립지대의 무표정과 대치될 수 있는 중립지대의 미소, 이로부터 이행되였다고 생각되는 희, 노, 애, 락에 속하는 미소를 화가들의 작품, 주로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서 그 다양성을 알아보기로 한다.
우선 무표정의 표현으로는 프랑스의 화가 난토이우(Robert Nanteuil 1623~78)의 ‘자화상’(1660~65)을 들 수 있다. 즉 마음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로 따라서 얼굴의 눈이나 입에도 아무런 표정이 표출된 것이 없다. 물론 무표정은 아무런 의지의 표현도 현실적으로 없다는 표정이기도 하나 아무런 표정도 표현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어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미소와도 상통되는 것으로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기쁜 감정의 표현인 희의 표현으로는 네덜란드의 화가 레이스테르(Judith Leyster 1609~1660)의 ‘자화상’(1635)을 들 수 있다. 화가는 지금 막 화폭에다 바이올린을 키면서 즐거워 만면의 웃음을 지우고 있는 그림을 그리다가 잠시 쉬는 모습의 자화상이다. 화폭의 웃음을 그리는 즐거움을 느껴서인지 화가의 입가에는 즐거움의 미소가 감돌고 있다.
노여움의 감정인 노의 표현으로는 독일의 화가 뒤라(Albrecht Durer1471~1528)의 ‘오스월드 크렐의 초상’ (1499)을 들 수 있는데 무엇이 마땅치 않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눈길은 한 곳을 주시 하고 있어 노여움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러한 준엄한 표정을 지워서 그 사람의 인품을 높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애석함의 애의 표현으로는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의 ‘교황 율리우스 2세’(1512)를 들 수 있는데 교황은 자기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옴을 감지한 듯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리고 있으며 신학적인 의미가 담긴 갖가지 색상의 반지를 낀 한 손은 흰 손수건을 쥐고 다른 한 손은 의자의 팔걸이에 놓고 애수에 잠겨 지난날을 사색하는 모습에 애수의 미소가 감돈다.
행복감에 젖은 락의 표현은 프랑스의 화가 라투르(Maurice Quentin d La Tour 1704-88)의 ‘자화상’(1735)을 들 수 있다. 이 자화상은 화가의 30대 초반의 자화상으로 화가가 된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 듯이 눈과 입가에는 만족과 행복의 미소가 감도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