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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 누가 알리오, 벽오동 심은 뜻을…

  • 입력 2008.10.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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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나 안 오시뇨 달맞이 가잔 뜻은 님을 모셔 가잠인데 어이타 우리 님은 가고 아니 오시느뇨 하늘아 무너져라 와르르 르르르 르르르 르르르 잔별아 쏟아져라 까르르 르르르 르르르 르르르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나 안 오시뇨 굿거리장단의 대중가요 <벽오동 심은 뜻은> 노랫말 표현이 아주 재미있다. ‘봉황을 보잤더니’ ‘어이타’ ‘안 오시뇨’ 등은 친한 사람들을 만나 주고받는 대화의 한 부분인 듯하다. 노래 도입부의 첫 단락도 그렇지만 ‘하늘아 무너져라’로 나가는 후렴부문과 ‘와르르 르르르…’ ‘까르르 르르르…’로 이어지는 대목에선 어깨가 절로 들썩일 정도로 흥겹다. 어찌 보면 대중가요라기보다 굵직한 남성 목소리에 걸 맞는 토속민요라고 하고 싶다. 김도향과 손창철의 만남, 그리고 대박예감 음악인 김도향이 작사·작곡하고 그가 한 때 결성해 뛰었던 남성듀엣(투코리언스)이 취입, 히트한 이 노래는 1970년 만들어졌다. ‘투코리언스’가 불러서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인기를 끈 이 노래는 우람하고 박력 있는 김도향과 손창철이 만나면서 탄생됐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군대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이 훈련소를 거쳐 자대 배치 받은 곳은 육군 1군사령부 군악대. 그곳엔 10명의 합창단원이 있었고, 이들 중 김도향과 손창철이 노래를 제일 잘 했다. 군 생활을 함께 한 이들은 1969년 일명 ‘개구리복(향토예비군)’을 받고 제대했다.전역한 김도향은 이듬해 혼자서 음반을 내고 가수활동에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군에서 같이 합창을 했던 손창철이 찾아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도향아! 우리 듀엣 안 해볼래?” 불쑥 그룹가수제안을 한 것이다.김도향은 손창철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듀엣이름을 ‘두 한국’으로 짓고 곧바로 노래연습에 들어갔다. 문제는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가’였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기성가수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지만 프로 듀엣답게 새로 만든 신곡을 선보여야 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둘은 결국 김도향이 군복무 때 틈틈이 써둔 곡들을 모아 음반을 내기로 하고 준비에 밤낮이 없었다. 여러 곡들 가운데 이들이 특히 심혈을 쏟은 ‘작품’이 하나 있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로 나가는 노래가 그것이다. 제목은 가사에 나오는 <벽오동 심은 뜻은>으로 그 때 전국에서 유명세를 탔던 수학선생 김현준 씨의 외아들 김도향의 철학적 삶을 담은 내용이었다. 여유 있는 집안의 외동아들로 자라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그는 어려서부터 늘 혼자서 자랐던 터라 외로움을 느끼며 컸다. 젊었을 때부터 인생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등 한마디로 올된 편이어서 노랫말도 자연히 그런 흐름을 바탕에 깔고 만들어졌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 그리고 몰려드는 유명세 연습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취입, 음반이 나왔고 본격 노래홍보에 들어갔다. 아무리 훌륭한 가요라도 알려지지 않으면 묻혀버려 결국 헛수고만 하게 되는 까닭이다. YWCA 청개구리클럽에서 사회도 보고 아마추어가수로 뛰었던 그들은 어느 날 잘 나갔던 당시 동양방송(TBC) 이백천 PD를 만났다. 그들의 노래를 들은 이 PD는 감탄사를 연발, 자기가 만드는 방송프로그램에 나와 줄 것을 부탁했다. 졸지에 출연제의를 받고 기뻐했던 김도향과 손창철은 그 때 이 PD가 “한 가지 지적할 게 있다”는 충고에 귀를 쫑긋했다. 얘기 골자는 듀엣이름을 고치는 게 좋겠다는 것. ‘두 한국’이란 이름 대신 다가올 국제화시대를 맞아 ‘투코리언스’로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해서 김도향과 손창철은 듀엣명칭을 투코리언스로 바꾸고 TBC-TV의 게임쇼 ‘명랑백화점’ 프로그램에 단 한차례 출연, 확 떠버렸다. 이를 계기로 출연섭외가 몰려들었고 각종 무대에 수시로 불려 나갔다. 인기듀엣으로 주가가 한창 치솟으면서 1972년엔 상복이 터졌다. 다른 가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그들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74년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하고 헤어졌다. 김도향은 CM제작사를 차렸고 손창철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듀엣가수데뷔 4년 만에 활동을 접어버린 것이다. 그 시절 청년 스타 김도향, 이제는 CM 송의 대부로 세월은 흘러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2년 어느 날. 김도향은 음악평론가가 된 이백천의 긴급전화요청으로 제주도의 한 노인요양원에서 <벽오동 심은 뜻은>을 부르게 됐다. 마을주민 200여 명 앞에서 노래를 한 건 노래봉사를 위해 약속했던 출연가수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대타로 불려간 것이다. 여기서 뒷얘기가 재미난다. 그곳에 온 뒤 3년 동안 말을 한마디도 않았던 한 할머니가 김도향의 구성진 노랫소리에 갑자기 말문이 터져 관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듀엣가수활동을 접은 김도향은 지금까지 국내 CM송의 대부라 할 만큼 오랜 세월동안 한 분야를 깊고 넓게 파고들고 있다. 방송되는 국내 거의 모든 CM작품들(3000여 편)을 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파를 타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제작된 CM송은 줄잡아 1만여 편에 이른다. 게다가 소리로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상음악까지 연구, 30장짜리 CD 역작을 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0년 연예계 데뷔 뒤 1집 음반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내고 TV출연을 두 번밖에 안 했다는 ‘60세 청년 김도향’, 그는 최근 새 음반을 내 또 한 번 매스컴의 초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