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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 보이는 눈길과 보이지 않는 눈길

  • 입력 2009.02.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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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기능은 사람의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으나 귀의 기능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 만일 보기 싫은 것이 있다면 눈을 감으면 되지만 귀는 닫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귀의 기능의 일부가 눈으로 나타난다. 큰소리에 놀라면 방울눈(puffed eye)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이 눈매와 눈길로 그 감정의 상태가 나타나서 내려뜨기(drop eye), 쳐다보기(lift eye), 곁눈질(side glance), 가는눈 뜨기(fine eye), 우는 눈(whimpered eye), 노려보기(steady gaze), 눈깜작이(blinkered) 등 여러 모양의 눈매와 눈길을 나타내게 된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의 눈에 곧 띠우는 눈뜨기와 그 눈길을 알 수 없는 눈감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곁눈질은 흥미, 불안이나 악의(惡意) 등을 나타내는 몸짓언어가 되기도 하는데 이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른 표정과 함께 읽어야 한다. 만일 웃는 얼굴이거나 눈썹이 약간 올라가는 표정과 함께라면 그것에 흥미가 있다는 표시가 되며, 만일 입술을 굳게 다물거나 눈썹꼬리에 잡힌 주름과 함께라면 의문, 거절 또는 악의나 비판 등을 나타내는 것이 되며 곁눈질 단독의 경우에는 상대에게 들키지 않고 무엇인가를 훔쳐보는 경우이며 때로는 수줍거나 부끄러운 경우의 몸짓언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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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눈질의 그림을 가장 정확히 그리고 다양하게 그린 것은 프랑스의 화가 라 투르(Gorges de La Tour 1593-1652)로 그가 그린 ‘클럽 에이스를 들고 있는 도박 사기꾼’(1635 경)에서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눈을 유심히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림의 우측에 있는 옷차림으로 보아 돈깨나 있는 듯하고 다소 어리석게 보이는 남자는 눈을 아래로 깔고 자기에게 할당된 패만을 주시하고 있으며, 그 옆의 화려한 옷차림의 여인은 술집 여주인인데 얼굴이 놀랄 만큼 완벽한 타원형을 하고 있다. 술집 여주인은 두 개의 신호를 동시에 보내고 있다. 손으로는 사기꾼 도박사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눈으로는 잡부에게 곁눈질을 하고 있다. 잡부는 즐거워 보이지만 눈앞에서 일어나는 공포에 괴로운 표정으로 혹시나 탄로 날 것을 우려해 도박사 쪽으로 곁눈질을 하고 있다. 사기꾼 도박사는 자기의 속임수가 발각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관객 쪽으로 곁눈질을 하고 있다.
이렇게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다른 몸동작은 멈추고 있어도 곁눈질 하나로 사기, 음모, 내통 등을 나타내는 표정이 되기도 하며 우려, 공포, 자신감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네 사람의 눈길로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그림의 사연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한 눈길 그림의 걸작이라 하겠다.
라 투르의 또 다른 곁눈질의 그림으로는 ‘여자 점쟁이’(1635~38)를 들 수 있다. 그림의 우측에 있는 늙은 노파가 점쟁이인데 말과 행동으로 점을 보러온 청년의 정신을 자기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자 청년은 그런 점괴라면 복채로 낸 돈을 돌려달라고 항의의 곁눈질을 하며 노파를 흘겨본다. 그 사이에 일당인 두 하수인으로 하여금 청년의 바지주머니에서 지갑을 훔치고 있으며, 다른 하수인은 청년의 금메달이 달린 금줄을 펜치로 자르고 있다. 두 여자 모두가 청년을 떳떳이 보지 못하고 곁눈질로 보면서 범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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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화가 프랑스 할스(Frans Hals 1580~1666)의 그림‘집시 처녀’ (1928~30)를 보면 한 여인이 무엇인가를 보고 곁눈질을 하며 비웃고 있다. 이 여인은 창녀이다. 그렇기에 세상을 보는 눈이 온전치가 못하여 모든 것이 참으로 보이지 않는데서 나오는 비웃음일 것이다. 즉 양쪽 구각(口角)이 위를 향하고 있어 웃음을 띠고 있으나 이것은 건성웃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안륜근이 전연 작용하지 않아 눈꺼풀과 눈썹에는 표정이 없고 눈길만을 밑으로 깔며 곁눈질을 하고 있어 비웃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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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화가 마스( Nicolaes Maes 1634~1693)가 그린 ‘기도하는 노파’(1655)를 보면 한 노파가 식탁 앞에서 합장하고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기도하기 보다는 남을 위한 기도이거나, 아니면 감사의 기도인 듯하다. 왜냐하면 오른 쪽 식탁 밑에 있던 고양이가 기도가 길어져 배고픈 것을 참을 수 없었던지 앞발로 식탁보를 끌어 당기도 있다.
무엇을 소원하는 기도는 빨리 끝낼 수 있으나 남을 위하거나 감사의 기도는 길어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이때까지 얻은 것이 많으며 또 남을 위한 기도라면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고마운 분이 한 두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을 감아서 할머니의 눈길을 알 수는 없지만 지나온 일에서, 아는 이들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눈길이 닿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눈매와 눈길로서 그 몸짓언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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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은 인상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에 상상적이고 신비한 세계를 찾아 나선 고독한 순교자라 할 수 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외삼촌댁에 보내져 어머니의 애정을 모르고 외롭게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그 고독했던 환경은 일찌감치 그가 내면세계로 여행하는 통로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예술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상징주의 물결이 문학, 음악, 미술 등 거의 모든 예술계를 지배하던 시기이었기 때문에 르동도 세심한 현실관찰에서 출발하여 상상력이 이끄는대로의 새로운 형태로 옮겨가는 완전히 독립적인 화풍을 추구했다.
생명의 재생을 회화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르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보이는 것의 논리’를 사용하려는 환상적이고 상징적인 경향의 것으로 그가 외눈박이를 자기의 그림에 자주 등장 시킨 것은 사람들이 어떤 표적을 겨냥할 때 한 눈을 감고 한 눈으로만 표적에 집중하는 것이 양 눈보다도 집중력이 높아지는 것으로, 그렇게 하면, 즉 집중하는 정신력 여하에 따라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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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감은 눈’(1890)은 그러한 작품 세계의 전환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폭 전면의 수평선 위에 눈을 감은 얼굴이 크게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르동은 환상적인 세계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매끈한 사실적인 재현과는 다른 양식으로 대범한 붓질로 그려진 어렴풋한 이미지는 감은 두 눈의 인물을 통해 보이지 않는 꿈의 세계를 연상시키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그의 예술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림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눈을 감은 채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평온한 표정에는 일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허공의 구름같이 나타나는 것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닌가 싶다.

네덜란드의 화가 브뤼겔(Brueghel 1528~1569)이 그린 ‘장님의 우화’(1568)라는 그림에서 6명의 장님이 서로 손과 지팡이로 의지하고 개울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을 그렸다. 그림속의 장님들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고개를 밑으로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개를 위로 또는 옆으로 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눈길의 방향으로 생각하고 걷고 있는데 그것은 빛을 듣고 소리를 보는 형식으로 나름대로의 눈길을 만들어 앞으로 한발짝씩 옮기고 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쓰러지면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화를 면할 길이 없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것인데 육감으로 소리를 보고 빛을 듣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들이다. 눈길을 자기 마음대로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눈길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함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그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