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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 이별은 성숙하기 위한 삶의 통과의례

  • 입력 2009.02.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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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 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거야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은 잊을 수는 없을 거야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잊을 수는 없을 거야우리는 숱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이별은 예고 없이 온다. 사랑하는 사람도, 애완동물도, 직장도, 죽음도 이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헤어질 땐 사랑과 정이 깃들어 있기에 슬픔과 아픔이 따른다. 요즘 구조조정으로 일터를 떠나야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이별이란 잠깐 사는 생명이 영원히 사는 곳으로 가는 간이역이라 생각하면 그것이 주는 슬픔과 아픔을 통해 보다 여유롭고 강해질 수 있다. 이별은 반드시 거치는 삶의 통과의례다. 길옥윤 작사·작곡, 패티 김(71·본명 김혜자)의 <이별>은 남녀의 아픈 헤어짐을 노래했다. 뜨겁게 사랑했던 부부가 갈라섰지만 언젠가는 그 옛날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란 내용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체험한 가수 자신의 절규이기도 해 크고 작은 이별을 겪은 사람들에게 공감의 폭을 넓혔다. 1973년 발표된 <이별>은 패티 김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국민가요랄 만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만큼 노래 탄생과정에 얽힌 에피소드도 많다. 먼저 길 씨와 음악적 만남이 예사롭지 않다.일본에서의 운명적 만남패티 김 노래 대부분은 길옥윤과 박춘석 씨의 곡이다. 길 씨와의 운명적 만남은 1960년대 외국에서 이뤄졌다. 일본에 처음 갔을 때로 캄보밴드(쿨 캐츠) 리더였던 색소폰연주자 길 씨를 몇 번 만났던 게 깊은 인연이 됐다. 길 씨는 “일본엔 미소라 히바리란 엔카스타는 있지만 인기 있는 팝 싱어는 없다. 일본에 패티 김 같은 스타일의 가수가 없으니까 일본서 활동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다 패티 김은 미국으로 갔다. 그녀는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잠시 귀국했다. 길 씨도 어머니 때문에 일본서 와 방송에 함께 출연하는 과정에서 더 친해졌다. 패티 김은 1966년 귀국, 길 씨와 만나 그해 <4월의 노래>를 받고 12월 서울 워커힐에서 결혼했다. 길 씨는 ‘패티와 이 밤을’이란 방송프로그램도 같이 했다. 딸(정아)도 낳고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갈라섰다. 1970년 별거를 시작, 1972년 봄 남남이 됐다. 이혼발표 기자회견도 했다. <이별>은 별거 중 남편 길 씨로부터 받은 노래다. 2년 가까이 헤어져 살던 중 미국에 있었던 길 씨가 뉴욕 하늘을 보고 패티 김을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다. 원 제목은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이었다. 그녀는 악보를 받고 제목이 아니라고 느껴져 며칠 생각하다 길 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이란 제목이 어떨까요?’라고 물었다. 그도 뜻을 같이 해 제목이 바뀌었다.그때까지 만해도 둘은 재결합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별>이 결국 ‘이혼 송’이 돼버렸다. 대중에게 <이별>이 이혼을 암시하는 노래로 알려졌다. 둘은 음악인으로선 잘 맞는 콤비였으나 부부로선 아니었다. 이혼 뒤 ‘패티 김이 길 씨를 찼다’고 소문이 났다. 그건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됐다. 청혼과 이혼 모두 그녀가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착하고 작곡을 잘 한다고 좋은 남편이 되는 건 아니란 생각에서였다. 패티 김은 이혼 뒤 1974년 길 씨가 작곡한 <사랑은 영원히>로 제4회 도쿄국제가요제에 나가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1976년 지금의 남편과 재혼패티 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길 씨와의 이혼이 그 무렵 스캔들 때문이 아니었느냐?’는 질문에 자세한 과정을 밝혀 눈길을 끈다. “별거 중에 지금의 남편(아르만도 게디니)을 만났다. 가수와 팬으로서였다. 결혼은 1976년에 했다. 그 무렵 내가 게디니를 만나서 길 씨를 찼다고 비난받았는데 그게 아니다. 그런 비난이 싫어서 도쿄가요제를 끝내고 미국으로 사실상 도망갔다. 어떻게 살아남아서 스타가 될 것인가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길 씨는 가정을 가질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정말 예술가다. 그는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고 나는 몇 십 년 계획을 짜는 사람이었다.” 패티 김은 “미국으로 다시 간 뒤엔 전혀 음악활동을 하지 않았다. 가장 힘든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회고했다. <이별>과 관련된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노래가 상종가를 치면서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진 것이다. 1973년 한국영화 흥행 1위작이 ‘이별’이었다. 패티 김의 빅 히트곡을 신상옥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 파리 현지 올 로케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신성일, 김지미, 오수미가 주연으로 나왔다.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음악가의 사랑과 갈등을 예술의 도시 파리를 무대로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옥색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지미의 단아한 모습은 눈길을 모았다. 영화 ‘이별’은 한국영화 최악의 불황기였던 1973년 서울 국도극장, 부산극장 등지서 상영됐다. 서울에서만 15만여 관객이 몰려 영화계에 활력소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열연한 오수미는 고인이 됐다. 패티 김은 지금도 여전히 현역가수로 뛰고 있다. 1959년 3월 큰 오빠친구(곽준영씨, 기타리스트) 권유로 미8군 무대에 데뷔한 그는 올해로 데뷔 51년째 가요계 생활을 하고 있다. 반세기동안 노래 외길만 걸어왔다. 그의 여정은 곧 우리나라 대중음악 역사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로 시작하는 <서울의 찬가>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시대의 시그널 뮤직’이었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로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설렘을 안겨줬는가 하면 <이별>을 통해 헤어짐의 고통을 겪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도 했다. <가시나무새> <사랑은 생명의 꽃> <빛과 그림자> 등은 고급스러운 가요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해 준 명곡들이다. 그녀는 2008년 4월 30일부터 사흘간 세종문화회관공연을 시작으로 데뷔 50년 전국투어 및 해외콘서트에 나섰다. 또 지난해 2월 26일부터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의 50년 노래인생을 들려줘 인기지면이 됐다.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 작곡가 길 씨와 만남과 헤어짐, 원래 예명이 ‘린다 김’이었던 사실 등을 진솔하게 털어놔 흥미로웠다. 그녀는 가수가 되겠다고 하자 집에서 반대해 가족 몰래 시작했다. 1958년 미군상대 공연을 위주로 하는 화양주식회사 전무로 있던 트럼펫연주자 ‘베니 김’(본명 김영순)을 소개받아 여름부터 훈련에 들어갔다. 다음해 초봄 정식오디션을 봤고 3월에 받은 첫 월급은 5만원이었다. 또 그녀의 가요계 첫 이름은 ‘린다 김’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들어 패티 페이지 노래를 좋아했던 터라 ‘패티 김’이 됐다.1959년 가수 데뷔, 1000여곡 취입패티 김은 1938년생으로 서울 중앙여고를 나와 1959년 가수로 데뷔했다. 지금까지 부른 노래는 1000여곡, 오리지널 곡은 500~600곡, 그렇게 해서 나온 음악앨범은 70여 장에 이른다. 국악영향도 많이 받았다. 중3에서 고1로 올라가는 사이 국악으로 발성연습의 바탕을 닦았다. 국립국악원에 다니면서 심청가도 6개월 만에 완창했다. 국악콩쿠르에서 1등도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져 집에서 난리가 났다.그녀의 아버지는 메이지대,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나왔다. 가족 모두가 노래를 잘한다. 어머니가 노래를 워낙 좋아해 저녁 먹고 나서 8남매(3남 5녀)가 합창했다. 집안에 음악이 그칠 때가 없었다. 그녀의 어릴 적 꿈은 스튜어디스였다. 음성이 예쁘다고 ‘아나운서 하라’는 말도 들었다. 여고 때 공부는 중간쯤이었으나 노래는 잘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따로 나가 집안형편이 어려웠고 6·25전쟁까지 터져 더 힘들었다. 전쟁 뒤 8남매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50주년 콘서트 때 42년 만에 8남매가 다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