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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 응시의 눈매와 눈길

  • 입력 2009.03.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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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의 표정, 특히 눈길의 자연스러운 교환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사람들 사이의 사귐에서는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신호가 되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지식은 주로 느낌과 경험이 구전문화형식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신경언어의 의미가 점차 밝혀지고 또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여 순간을 놓치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과거지사가 돼버리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 있어서는 비언어소통(non verbal communication)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요시 되고 있다.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시작되는 것이 눈길의 자연스러운 교류로 이루어지는 비언어소통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눈매(eye shape)와 눈길(sight line)이 지니는 의미와 그 의도를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눈의 표정을 자기의도대로 정확히 표현하고 전달하는 지식을 구비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사람의 눈매와 눈길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응시(凝視 stare)이다. 응시에는 극과 극의 서로 다른 감정의 의미가 내포되기도 하며 또 그 표현에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애매한 점이 많아 그 참의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호적 응시와 비우호적 응시
눈길이 어떤 목적물의 한곳을 집중해 보는 것을 응시 또는 주시라 하며 이렇게 눈길을 한곳에 집중하려면 눈의 모든 근육을 동원해서 눈알의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응시의 몸짓언어로의 의미는 눈길을 떼지 않고 계속 보는 경우뿐만이 아니라, 일단 응시하였던 눈길을 금방 돌리는 경우에도 의미가 있게 된다.
응시가 계속되는 경우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즉 우호적인 응시와 비우호적인 응시인데, 우호적인 응시는 그 눈길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우의와 사랑 등의 적극적인 감정을 내포하는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눈길이 자주 마주치게 되고 서로를 응시하게 되는 데 이것을 눈 맞춤(eye contact)이라 하며 서로간의 가장 초보적인 사랑의 우호적 의사표시로 해석 된다.
비우호적 응시란 눈길에 힘을 주고서의 응시로 눈길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호적 응시의 경우와는 달리 그 시간도 10초 이상(보통의 겨우는 2~4초) 응시하는 것으로 이것을 한간에서는 노려보기(strong stare)라는 말로 표현한다. 노려보기는 공격성을 띄는 것으로 적의(敵意) 그리고 공포나 무서움 등이 내포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호시탐탐(虎視耽耽)이라는 용어이다. 즉 호랑이가 포획물에 눈을 떼지 않고 응시하며 그 눈길이 자기에게 주의하지 않고 안심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덤벼들게 되는데 노려보는 눈길로 공격성을 띈 응시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응시하였던 눈길을 피하거나 다시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도 비우호적인 것으로 쑥스러움, 창피, 의미 없는 거만, 하는 수 없는 복종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또 속으로는 방어적인 태세를 가추는 몸짓언어로 간주 된다.
이러한 ‘눈 맞춤’의 장면을 그림으로 잘 표현한 것은 이탈리아의 화가 피아체타(Giovanni Battista Piazzeta 1683-1754)의 작품 ‘우물가의 리브가(레베카)’(1740)이다.

[1L]


이 그림은 성경창세기의 일화를 소재로 한 것인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나이가 차자 며느리 감을 구하기 위해 충복 한 사람을 자기의 고향으로 보내 마땅한 규수를 골라오게 하였다. 충복은 나름대로 생각하길 예쁘거나, 돈이 많거나, 재주가 뛰어난 규수가 아니라 자비심이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처녀를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동네 우물가에 도달하자 많은 처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었다. 충복은 그중 한 처녀인 리브가에게 물을 좀 마시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리브가는 충복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충복이 끌고 간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게 하는 친절을 자진해서 베풀었다. 이 장면을 본 충복은 바로 자기가 찾던 규수가 리브가라는 것을 알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신이 선택한 규수인 리브가 앞에 나아가 귀중한 패물을 건네주며 주인을 대신해 청혼하였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한 것인데 충복은 손을 합장하여 신에게 감사 올리며 리브가를 응시하고 있고, 리브가는 난데없는 청혼에 당황하면서도 우호적인 눈길을 충복에서 떼지 않고 응시하는 것으로 즉 눈 맞춤으로 청혼을 수락하고 있다.

응시에 대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
응시하는 것이 좋은 의미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금기된 행위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유교문화를 거친 우리 사회에서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위와 아래를 엄격히 지키는 수직 문화로 윗사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을 피하라는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윗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아랫사람이 눈을 피하여야 하는 것으로 만일 윗사람의 눈을 응시하면 예의 없는 불유쾌한 행위로 되며 심한 경우에는 적대시 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서양문화권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을 가릴 것 없이 반드시 상대방의 눈매를 마주 보면서 상대방의 말에 반응을 보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의이며 눈길을 피하고 이야기하면 거짓으로 대하는 것이 된다.
비우호적인 응시인 ‘노려보기’를 잘 표현한 그림은 스위스의 여류화가 카우프만(Angelika Kauffman 1741~1807)의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망설이는 자화상’(1775)이다.
[2L]

카우프만은 재주가 너무 많아 고민했던 여성이다. 그녀는 자기의 고민을 그림으로 매우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그림 한 가우데 흰옷을 입고 있는 여성이 화가 자신이며 오른쪽의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은 패럿을 들고 있어 미술을 상징하며, 왼쪽에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은 악보를 들고 있어 음악을 상징 한다.
즉 가운데 여인은 음악에도 재능이 있고 미술에도 소질이 있어 어느 것을 택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미술과 음악은 각각 자기 쪽으로 여인을 유인하려고 서로 응시하고 있다. 즉 노려보고 있는데 음악은 앉아 있기 때문에 밑에서 위로 미술을 노려보며 미술은 서있기 때문에 앉아 있는 음악을 내려 노려보기를 하고 있는데 두 여인의 눈길은 서로가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올려 노려보기를 하는 음악은 눈길의 힘이 빠졌지만 미술의 내려 노려보기를 하는 눈길에는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그 눈매로 알 수 있다. 화가는 모름지기 이 두 눈매의 상태와 함께 노려보기의 방향으로 즉 밑에서 위를 보는 것과 위에서 밑을 보는 것으로 미술과 음악의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의 결정은 하고 나서의 그림인데 자기의 선택을 이렇듯 두 여인의 눈매와 눈길로 표현하고 있다.
또 공격성 응시인 ‘노려보기’를 잘 표현한 그림은 독일의 화가 호이에르바하(Anselm Feuerbach 1829~80)의 작품인 ‘자화상’(1852 경)을 볼 수 있다.

[3L]

이 자화상은 화가가 되어서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시절의 것으로 눈을 부릅뜨고 한 곳을 응시하여 양 눈의 검은자위는 위로 올라가서 흰자위가 눈의 밑부분과 좌우를 차지한 소위 삼백눈(三白眼)으로 전형적인 ‘째려보는 눈매’를 하고 있다. 그림이 자기 뜻대로 잘 되지 않거나 아니면 누구와의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아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의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