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music episode] 기다림의 의미 전해주는 잔잔한 서정시, 김소월 님 시에 이화목 선생 곡 붙인 ‘서정적인 노래’

1972년 ‘화가 가수’ 정미조 데뷔곡, 이후 수많은 가수에게 리메이크 돼

  • 입력 2009.04.01 00:00
  • 기자명 emddaily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절)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홀로이 개여울에 주저 앉아서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하염없이 무엇을 생각 합니다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2절)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하염없이 무엇을 생각 합니다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화가 여가수’ 정미조(62·수원대 서양화전공 교수)가 20대 중반에 취입한 대중가요 <개여울>은 들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청아한 목소리에 잔잔히 흐르는 멜로디가 차분함을 더해준다. 겨울잠을 깨고 생동하는 봄에 부르면 감흥이 인다.<개여울>은 김소월의 시에 이화목 선생이 곡을 붙여 만들어진 가요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풍으로 나가는 이 노래는 서정적인 맛이 물씬 난다. 노래가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 건 1972년. 정미조의 데뷔곡으로 가요계에 정식신고를 한 것이다. 훗날 정미조 삶의 여정을 대변하는 곡이 됐다. 그 뒤로 여러 남녀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됐을 만큼 인기곡 대열에 올랐다. 여진, 송창식, 최양숙으로 이어지던 <개여울>은 심수봉이 다시 부르면서 인기를 끌었다. 2006년 가수 적우가 리메이크하면서 20년 넘게 <개여울>의 인기가 끊이지 않음을 또 한 번 증명했다. 노랫말로 쓰인 김소월의 시 ‘개여울’은 기다림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작품이다. 자신을 떠난 연인을 기다리면서, 그것도 ‘있었겠지요’나 ‘부탁인지요’란 표현처럼 ‘돌아오겠다’는 그 약속이 확실치는 않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삶의 동력을 얻는다. 노래제목인 ‘개여울’ 은 ‘개천의 여울’을 일컫는다. 물 흐르는 지형에 경사가 생겨 흐름이 빨라지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개여울’ 시는 1966년 만들어졌지만 1972년 노래로 거듭 태어나 대중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정한(情恨)의 시인으로 불리는 소월은 그곳에서의 정서를 그렇게 읊었다. ‘당신’과 말하는 이의 관계가 시의 한 축이다. 그냥 보면 떠난 임에 대한 회고조 같으나 그렇잖다. 흐르는 것, 없어지는 것에 대한 소월 나름의 리뷰가 담겨 있다. 물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가는 것’들을 상징한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정서가 시의 얼개를 이룬다.‘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의 대목에서 시인은 지금에서의 없어짐이 그저 소멸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언뜻 보면 체념이지만 그를 자연의 섭리 속으로 받아들이려는 현실세계에서의 긍정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시의 바탕이 그러했던 정미조는 개여울이 알려주는 기다림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실천한 예술가다. 덕분에 그는 7년 반의 가수생활을 접고 그림공부를 위해 파리로 훌쩍 떠났다.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정미조는 지적인 외모와 풍부한 성량으로 197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대형 가수였다.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을 히트시키며 가요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다 1979년 가요계를 돌연 은퇴,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화가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파리7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제목=‘한국의 무신도 연구')를 받은 뒤 1985년 귀국했다. 돌아와선 1년간 시간강사로 경희대, 한양대, 경남대 등에서 강의를 하다 1993년 수원대 교수로 임용되면서 지금에 이른다. 종합예술인으로 방향 잡아그가 교수생활을 하면서도 한동안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학생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듣고 와선 “교수님, 유명한 가수였다면서요?”하고 묻곤 할 정도다. 그러다가 2001년 10월, 참으로 오랜만에 ‘가수가 아닌 자신의 예술과 삶을 얘기하는 자리’에 나섰다. KBS ‘예술극장’에서였다. 가수생활을 떠난 지 22년만이었다. 2005년엔 자신의 히트곡을 자비를 들여 CD를 만들기도 했다. 교통방송에 나가 얘기를 하는데 그래도 옛날 유명한 가수였는데 자신의 곡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LP판조차도 없어 서운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갖고 있는 LP판에서 음원을 뽑아 CD로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라도 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동기였다. 그러다가 한번은 집 주차장에서 주차를 돕는 아저씨가 ‘아니, 요즘은 왜 TV에 안 나와요? 보고 싶은데…’라고 말했다. 이후 정미조는 팬들도, 마음도 아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그림과 음악을 접목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그림을 설명하면서 중간 중간에 자신의 삶을 노래로 나타내는 일종의 ‘종합예술행위’를 해야겠다는 계획이었다. 노래만이 아닌 그림을 앞세운 종합예술인으로서 노래를 곁들이게 된 것 이다. 정미조의 삶은 독특하다. 경기도 김포의 최고 부잣집에서 3남3녀 중 막내로 5~6살 때부터 음악적 끼를 보였다. 집에 있었던 일제TV를 통해 AFKN방송을 보면서 미국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것을 보고 따라했다. 농악을 봤을 때도 그랬다. 그의 끼는 집안내력에서 비롯됐다. 아버지가 극장과 양조장사업가로 트럼펫을 잘 불렀고 어머니가 학창시절 메스게임을 지휘했을 만큼 활동적이고 춤에 일가견 있어 가능했다. 외가 쪽에도 화가, 조각가, 미술학원장 등이 있었다. 예능적 인자를 물려받은 정미조는 음악, 춤, 미술적 재능까지 갖고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무용에서 주연을 맡았고 중학교 땐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받곤 했다. 고교 때부터는 사생대회 단골수상자였다. 합창부 활동을 하면서 콩쿠르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미술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무용은 레슨을 받다 몸에 고장이 났고 음악은 성악레슨을 받아도 재미가 없었다. 그는 외삼촌이 하는 입시학원(미술연구소)을 거쳐 이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미대 다니며 시작한 가수의 길그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기숙사에 들어갔고 그곳 친구들과 친해지며 노래를 불렀다. 신입생환영회 때 친구들 추천으로 무대에 나가 팝송을 불렀다. 앙코르가 나오고 난리가 났다. 순식간에 ‘이대의 명물’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처장이 불러 “너 노래 잘 한다며?”라고 물으며 대학행사에 출연하게 했다. 졸지에 대학가 인기가수로 자리 잡았다. 축제 때마다 초대가수로 나가기도 하고 학교 부활절행사 땐 음대생을 제치고 가스펠송을 불렀다. 1970년 대학 2학년 땐 국군위문공연은 물론 이대생 20명으로 조직된 파월장병위문공연단으로 공군 특별기를 타고 가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후 음반제작 제의가 쏟아졌다. 축제 때 초정된 패티 김과 한 무대에 서면서 그녀의 노래에 반한 패티 김으로부터 자신이 출연하는 TV쇼에 고정출연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할 수 없었다. 재학 중 연예활동 등 외부활동을 제한하는 이대 학칙 때문이었다. 레코드사에서도 대학졸업 후 노래를 부르는 조건으로 계약하자고 졸랐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대학 땐 공부를 잘해 늘 장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4년 내내 과대표를 맡으며 활발한 대학생활을 한지라 미술이 아닌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심각한 결정사항이었다. 그 때 지도교수는 “일단 노래를 하라. 넌 착실하니 그림은 얼마든지 다시 그릴 수 있을 것이다”며 조언했다.이렇게 해서 대학졸업도 하기 전에 레코드사와 음반취입과 가수활동을 계약했다. 졸업하던 해인 1772년 3월 LP음반이 처음 나왔다. 4월엔 프라이보이 곽규석이 진행하는 TBC의 TV쇼 <쇼쇼쇼>에도 출연, 팝송 <마이웨이>를 불렀다. 단 한 번의 출연으로 레코드사와 방송국의 타깃이 됐다. 여기저기서 “우리가 키워주겠다”고 달려들 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땐 가수 중 대학을 나온 사람이 드물었다. 가수 김상희가 고려대 법대를 다니면서 얼굴 없는 가수생활을 하다 졸업한 뒤 본격 활동을 한 게 전부였다. 그가 두 번째였다. 재학 중엔 노래를 부르지 않다가 대학졸업 뒤 가수가 된 사람으론 최초였다. 거기다가 그는 잘 나간다는 이대 출신이란 희귀성에다 외모, 가창력이 그를 대형가수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그는 데뷔 2~3개월 만에 전국가수가 됐다. 피아트자동차를 상품으로 내건 KBS신인가요제에서의 우승은 물론 동아방송(DBS) 노래경연프로 10주 연속우승 을 했다. 한 달에 28회나 TV출연을 한 적 있다. 늘 앙드레김이 만든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른 인연으로 앙드레김 컬렉션에 특별출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러기를 7년 반, 1978년 제9회 야마하국제가요제에 한국대표로 나가 <아 사랑아>로 최우수 가창상을 받고는 ‘소리는 내고 싶은 만큼 냈다. 새 길을 가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주저 없이 가요계를 떠나 화가로 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