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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 피부접촉은 마음성장의 안테나 달기

  • 입력 2009.05.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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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 특히 3세 미만의 어린이에게는 안아주고 업어주는 등의 신체접촉 즉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직접적인 피부접촉(skin contact)은 애정이 교류되는 것으로 아이들의 정서안정에 도움이 되며, 이것이 자라서는 다른 사람과의 신뢰관계를 구축하는데 크게 역할하게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어머니의 포근한 이미지가 어린이의 마음에 새겨져서 이것이 어린이에게 불안이 생길 때 마음의 의지가 된다는 것이다.
피부접촉이 부족할 때는 정서 불안으로 여러 가지 이상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으로 예를 들면 공격적 행동을 하게 되거나, 무기력해지거나 아니면 표정이 굳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속담에 ‘세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어려서 배운 버릇이 평생 간다는 것으로 이 속담 가운데에는 세 살 때까지 엄마가 아기에게 쏟아주는 정성여하에 따라 아기의 성격형성에 크게 영향 미친다는 것으로,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엄마가 아기를 안아주고(hugging), 보듬어 (touching)주는 것과 같은 피부접촉이 있어야 친밀감이 형성돼 아기가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되어 좋은 성격이나 인격형성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심리학에서도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애정은 피부의 접촉 없이는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촉각적인 자극에 의한 촉각적 체험은 자식의 인격이 건전하게 발달될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의 피부접촉은 마음이 성장할 수 있는 안테나를 달아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피부접촉을 ‘스킨십(skinship)’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스킨십’은 영어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일본식 영어로서 일본에서 교육이나 육아 용어의 하나로 자기네들이 만들어낸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으며 최근에 들어서는 교육이나 육아 용어뿐만이 아니라 이성간의 직접적인 피부접촉을 가리키는 말이나 서로 간의 정서적 교류를 통한 융합을 의미하는 말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스킨십’의 다듬은 말로 ‘피부접촉’과 ‘살갗 닿기’라는 용어를 내놓았으며, 최근 들어서는 널리 쓰이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정서적 교류를 통한 융합을 가리키기에 부족함이 있다하여 ‘피부접촉’과 ‘살갗 닿기’가 ‘스킨십’의 다듬은 말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여전이 ‘스킨십’이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마음의 접촉 이상으로 긴밀한 감정의 교류까지를 뜻하는 것으로 현대의 젊은이들은 우정이나 연애관계에 있어서 촉각적 체험을 요구하는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거장들의 작품 가운데 피부접촉과 관계되는 것들이 있어 이를 보면서 피부접촉의 진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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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여류 화가 파올라 모더존 베커(Paula Modersohn Becker 1865~1907)가 그린 ‘누워있는 엄마와 아기’(1906)를 보면 이 화가의 불행했던 과거가 생각난다. 즉 이 화가는 결혼하여 6년이 지나도록 임신이 되지 않아 자기가 상상임신을 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애를 잉태하기를 원해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을 그리고 나서 일약 유명해 졌고, 임신도 되어 애를 낳게 되었다. ‘누워있는 엄마와 아기’는 모름지기 자기와 자기가 낳을 아기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인 것으로 생각된다.
어머니와 아기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아기를 안고 잠을 자고 있다. 즉 어머니와 아기는 100%의 피부접촉으로 어머니의 애정을 아기에게 주고 있는 것으로 아마도 화가는 피부접촉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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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화가 레이턴(Sir Federic Leighton 1830~96)의 작품 ‘어머니와 아이’ (1865)를 보면 그림 배경의 값비싼 일본 병풍과 화려한 카펫 그리고 여인이 입고 있는 유행에 맞춰 새롭게 디자인한 듯한 고풍스러운 의상은 이 가정이 얼마나 부유한 가를 말해 준다.
어머니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며 아이는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작고 빨간 과일을 권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녀간 다정스러운 광경이라고 보겠으나 원래대로 한다면 어머니가 아이에게 과일이라도 주는 장면이어야 하는데 아이가 어머니에게 과일을 권하고 있으며 그것도 어머니는 이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아래로 깔고 있어 과일을 권하던 아이는 주춤하고 있으며 동시에 몸도 쭈그리고 있다.
전자의 베커의 ‘누워있는 엄마와 아기’와 후자인 레이턴의 ‘어머니와 아이’의 그림을 어머니와 어린이의 관계를 피부접촉이라는 면에서 심리학적인 분석을 한다면 두 그림은 극에서 극을 달리는 차가 있는 그림이라 하겠다.
심리학에서는 모자간의 피부접촉을 세 형으로 분류하는데 우선 첫째 형은 어린이의 어떤 요구에도 어머니가 즉시 응하여 모자의 피부접촉이 자주 있는 형으로 어머니를 안전기지로 생각하게 되어 비록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곧 돌아 올 것으로 믿기 때문에 불안이 없으며 탐색행동을 스스로 개척하는 형이며, 두 번째 형은 어머니가 아이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으며 피부접촉도 그리 많지 않은 형으로 어린이는 어머니의 반응을 믿을 수가 없어 불안하며 어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분리(分離)불안을 느껴 어머니를 떨어져 탐색행동 따위는 할 수 없는 형이다. 세 번째 형은 어머니는 아이의 요구에 거부적인 반응을 보여 피부접촉 따위는 별로 하지 않은 형으로 아이는 불안을 사전에 회피하려는 방어적 태도를 보이며 어머니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는 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인 베커의 ‘누워있는 엄마와 아기’는 첫 째 형일 것이며 후자인 레이턴의 ‘어머니와 아이’의 그림은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형에 해당 될 것이다.
모자의 피부접촉관계로 분류한 세 형을 전제로 그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생각하며 그림을 보다가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 그림이 모두 어머니가 과일 또는 야채를 깎는데 옆에서 아이가 보이는 반응을 앞의 세 형에 적용시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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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화가 호흐(Pieter de Hooch 1629~77)의 작품 ‘사과 껍질을 벗기는 여인’ (1663경)을 보면 어머니가 사과를 깎고 있으며 아이가 옆에 서있다. 아이는 어머니의 사과 껍질 벗기는 것이 신기 한 듯 손을 내밀어 벗긴 사과 껍질을 만지려 하자 어머니로서는 다소 성가신 일이지만 아이의 요구이기에 일손을 멈추고 아이에게 이를 만져보게 하고 있다. 분명 이 모녀는 첫째 형의 관계로 키우고 자랐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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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화가 테르보르흐(Gerard Ter Borch )의 작품 ‘사과를 깎는 여인’ (1617~1681)을 보면 어머니가 사과 껍질을 깎고 있고 어린이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를 보고 있으며 앞서 그림의 어린이와 같이 껍질을 만지고 싶어 어머니의 눈치만 보고 있다. 어머니는 아랑곳 하지 않고 벗긴 껍질은 테이블 위에 놓아 버렸다. 이 그림의 모녀는 두 번째 형의 관계로 키우고 자랐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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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화가 마스(Nicolas Maes 1634~93)의 작품 ‘당근 껍질을 벗기는 여인’(1665)을 보면 어머니는 당근 껍질을 벗기고 있으며 아이는 옆에 서 있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은 화가 나 있으며 어머니는 이를 아랑곳 하지 않고 일을 계속 한다. 그림의 밑을 보면 이미 껍질을 벗긴 당근 두 개가 놓여 있고 그 뒤의 소쿠리에는 앞으로 일을 하여야 할 당근이 많이 들어 있다. 결국 아이는 이미 두 개의 당근의 껍질을 벗기는 동안 이러한 자세로 계속 보아 왔고 앞으로 이런 식으로 보아야 하는 것에 대한 지루함과 항의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분명 이 모녀는 셋째 형의 관계로 키우고 자랐으리라 생각된다.
이렇듯 그림을 통해서도 피부접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그림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화가들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여실히 표현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