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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tal clinic] 우등생이 앓는 입시병

  • 입력 2009.06.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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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날, 얼굴이 긴장되어 있고 몸이 좀 약해보이나 매우 영리해 보이는 고교 2학년 남학생이 부모와 함께 진료실을 찾아 왔다.이 학생이 병원에 오게 된 이유는 며칠 전부터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으며, 자기가 걸어가면 학생들이 보고 있다가 자기가 쳐다보면 싹 고개를 돌린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자기 위주로 수업을 해 다른 학생들이 자기를 미워한다, 집이 학교에서 가까운데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기 집을 쳐다봐서 망원경으로 보니 아이들이 그걸 눈치 채고 없어졌다는 등의 이야기를 부모에게 하기 때문이었다. 부모는 아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우등생이고 착실했는데 이렇게 된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하였다. 학생과의 면담에서 밝혀진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수학성적에 대한 집착, 결국 병으로 나타난 것며칠 전에 그런 일이 있기 전, 작년 6월부터 마음의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치면 항상 수학은 전교 1~2등이고 전체모의고사 성적이 5등 이내였는데 6월부터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전체 성적이 떨어진 것도 떨어진 것이지만 수학이 보통 정도의 성적밖에 나오지 않았을 때 초조감, 좌절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만회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열심히 하였지만 2학기 들어 모의고사를 쳤을 때 수학성적은 더 떨어지고 전체 성적도 급격히 떨어지기만 했다.나름대로 자체 요인분석을 했더니 수학공부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공부 방식은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그것을 알 때까지 며칠이고 생각하여 혼자 힘으로 푸는 것인데 2학년 6월까지는 그런 식이 통했다. 왜냐하면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수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6월까지의 진도를 예습해 놓을 수 있었는데 그 뒤부터는 학교수업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런데 학교진도는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2학년에 다 마쳐야 되기 때문에 매우 빨랐다. 그래서 한 문제 한 문제를 캐듯이 하는 종전의 공부 방식으로는 학교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수학이 어려워지면서 다른 공부에 대한 것도 소홀히 하게 되고 오로지 수학에만 매달렸으나 도저히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공부 방법을 바꾸어보려고도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계획표를 짜는 시간이 늘어갔다. 과도하게 잡힌 계획표는 번번이 달성되지 않고 좌절만 더해갔다.그러면서 공상이 많아지고 현 교육제도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고 때로는 증오심을 느꼈다. 이렇게 수학, 물리, 화학을 가르쳐서 인재를 키울 수 있나, 실험·실습시설이 너무 엉망이다, 도서관에 책이 없다, 교육제도가 잘못됐다, 사회구조 때문에 올바르게 교육 받지 못하고 희생된다는 등의 생각이 들었다. 교육신문과 과학잡지를 열심히 읽었다. 다시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으나 마찬가지 생활을 보냈으며 개학하고 며칠 되지 않은 날, 앞에서 언급한 증세가 시작되었다.이 학생은 2남 1녀의 막내이고 아버지가 조그만 회사의 회사원으로 넉넉지 못한 살림에 뒷받침이 없었어도 공부를 잘하고 똑똑하여 초등학교 때는 줄곧 반장을 하고 동네에서 수재로 소문이 났다. 특히 산수를 잘해 산수경시대회에도 나가 상을 받았고 장래 과학자가 될 꿈을 가졌으며 산수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중학교에서도 반장을 하면서 1~2등을 했고 수학에는 발군의 성적을 보였다. 고등학교에 와서도 수학을 잘해 수학올림피아드에 출전하였고 학교에서도 수학하면 알아줄 정도였다. 형도 과학을 전공했고 그런 형 못지않은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어떻게 보면 자기의 생명과도 같고 존재가치와도 같은 수학이 흔들리면서 전 인생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수학을 회복하지 않고는 다른 공부가 안되었다.계속된 면담을 통해 이 학생이 깨닫게 된 것은 공부방법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지 않아 수학성적과 전체 성적이 떨어졌고 그러한 현실을 직면하여 극복하지 못해 현실도피를 한 결과, 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제도를 탓하고 학교를 탓한 것도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니 자존심이 상해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선생님, 학생들이 이상하게 본다는 것도 자기가 의식하는 마음이 있어 그런 것 같다고 했다.그래서 수학공부 방법을 바꾸고 떨어진 성적에 대해 견디면서 점진적으로 성적을 올리겠다는 마음이 되면서 남을 의식하는 마음이 줄었으며 괴롭긴 하나 면담과 투약을 받아 가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개인의 문제를 넘어 전쟁터로 변한 입시제도도 문제치료 초기에는 자기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학교를 자퇴해서 수학을 자기방식으로 회복한 뒤 다른 공부를 하겠다고 우기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또 다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이제 고비를 넘기고 학교를 다니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모든 노이로제·정신병은 현실의 어려움을 피해가는 방패가 된다. 원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것이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고 병 증세만 걱정하는 결과가 된다. 노이로제·정신병을 고치려면 본래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극복해야 된다.이 환자에 있어서 본래의 어려움은 수학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도저히 안 되니 남이 나를 쳐다본다, 의식한다는 문제로 피해갔고 그것만 고민하면 다른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이 되었다. 다행히 환자는 치료를 통하여 그것을 인식하고 노력중이다.그런데 이렇게 병이 나게 된 근본적 배경은 이 학생의 약한 성격이다. 성숙한 성격이라면 ‘내가 과거에 수학을 잘하였지만 지금 공부방법이 현실에 맞지 않아 잠시 성적이 떨어졌으니 이제 공부 방법을 바꾸어 노력해야겠다. 그렇더라도 당분간은 성적이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걸 참고 견디어내야 하겠다’고 해야 하는데 마음이 어리니까 그게 안 된다. 그래서 이 학생의 완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성격을 자기 산수 잘하는 것만 생각하는 초등학생 같은 성격에서 여러 가지를 전체적으로 생각하는 성인의 성격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앞으로 험한 세파를 견디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사실 이 학생을 치료하면서 참으로 안타깝고 공감이 되는 점은 우리의 교육현실에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이 학생이 우리의 교육제도가 잘못되고 이렇게 교육해서 무슨 인재가 나오겠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학생의 경우에는 병적인 원인과 아울러 현실을 외면하려는 노이로제적 동기에서 나왔지만 그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우리의 교육, 특히 고교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자성(自省)의 소리가 높다. 과열입시로 전쟁터처럼 변해버린 학교. 그곳에서 병적인 현실에 적응하여 입시전사(戰士)가 되어 싸우는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 실종된 교육. 이 학생이 자기의 병을 고치듯 지금의 교육계가 자신의 병을 진단하여 치료해야 할 때이다.